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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능 부정이 주는 교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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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2005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 휴대전화를 이용한 부정행위가 전국적으로 이뤄진 사실이 적발돼 국민에게 큰 충격을 안겨주고 있다. 수십 명이 조직적으로 모의해 거액이 오고 간 경우도 있고, 대학생이나 입시학원이 연루된 경우도 있으며, 몇 해 전부터 자행된 부정행위가 대물림돼 왔다는 사실이 폭로되기도 했다.

기술적 진보를 악용해 부정행위가 점점 교묘해지는 현상은 심각한 사회문제이긴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만 벌어지는 특별한 행태는 아니다. 2002년 미국 메릴랜드 대학에서는 6명의 재학생이 학교에서 치러진 회계학 시험에서 문자메시지를 이용한 부정행위를 한 사실이 발각돼, 전원 F학점을 주고 성적표에 '부정행위를 했음'을 명시한 사건이 있었다. 더욱 놀랍게도, 휴대전화를 이용한 시험 부정행위가 2002년 한 해만 메릴랜드 대학에서 무려 156건이나 발생했다는 사실이다. 같은 해 일본에서도 히토쓰바시대학 재학생 26명이 시험 시간에 시험문제 정답을 휴대전화로 수신한 사실이 드러나 모두 낙제점을 준 사건이 있었다.

요즘 우리나라 중.고교 풍속도를 잘 아는 사람들이라면 이런 뉴스가 그다지 충격적이지 않을 것이다. 이미 일선 학교에선 휴대전화의 문자메시지를 이용한 시험부정이 단속 대상 1순위가 될 정도로 심각한 골칫거리이기 때문이다. 시험시간에 먼저 문제를 푼 뒤 화장실에 다녀오겠다고 나간 학생이 친구들에게 문자로 답을 전송하는 일은 새로울 것도 없는 부정행위다.

요즘 아이들에게 휴대전화는 거의 신체의 일부가 되었다. 지하철이나 버스에서는 물론, 수업시간에도 짝꿍이랑 떠드는 것이 아니라 옆 반 친구들과 휴대전화로 문자메시지를 주고받으며 떠드는(?) 학생들이 종종 있을 정도다. 그래서 요즘 중.고등학생들에게 가장 무서운 체벌은 때리는 것이 아니라, '휴대전화를 일주일간 압수'하는 벌이란다. 수업시간에 문자를 보내다 걸려 '휴대전화 압수'라도 당하면, 그 주는 지옥 같은 한 주가 된다. 단 하루라도 휴대전화가 없으면 못 견디는 학생들. 이미 그들에게 휴대전화는 세상과 소통하는 입이자 귀인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수능부정사건을 단지 '과열 입시경쟁이 만든 불행이며 모두가 희생자'라는 논리나 '시험 감독이 소홀한 탓'이라며 정부를 질책하는 일은 무책임하고 공허한 말장난일 뿐이다. 수능시험장 주변의 기지국 전원을 수능시간 동안 차단하겠다는 방안이나, 전파 탐지봉을 이용해 이동전화의 동작을 추적하겠다는 발상은 단세포적인 반응이라는 생각마저 든다.

앞으로 10년 후에는 연필에 컴퓨터가 장착되고 책받침으로 인터넷 서핑을 할 수 있는 '유비쿼터스 시대'가 올 텐데, 그때에는 또 어떤 탐지봉으로 시험감독을 중무장시킬 셈인가!

지금 우리는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지는 새로운 과학기술들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가'에 대해 교육하고 토론해야 하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인터넷에서 영화파일이나 음악파일을 내려받으면서도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는 중.고등학생들에게 '공유돼야 할 지식과 저작권 보호를 받아야 할 지식을 구별하는 능력'을 가르쳐줘야 하고, 강남의 길거리에 CCD 카메라를 설치하는 것이 범죄 예방인지 사생활 침해인지 함께 모여 토론해야 한다.

속칭 '선수'들이 학생들과 휴대전화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시험시간 안에 정답을 전송하기 위해 작전을 펼쳤던 그날의 모습을 상상해 보면, 그들이 커서 사회에 나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어떤 일을 저지를지 생각만 해도 소름끼친다. 과학기술을 올바르게 활용하는 교육. 진작 했어야 할 이런 교육과 토론을 소홀히 한 우리 세대의 무책임은 머지않아 다음 세대에게 더욱 끔찍한 사회문제를 안겨주는 '치명적인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정재승 KAIST 교수,바이오시스템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