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반 드신 혜암 종정 "공부하다 죽어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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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공부하다 죽어라."

지난해 12월 31일 입적한 혜암(慧菴)큰스님은 평생 깨달음을 찾아 꼿꼿이 참선해온 선승(禪僧)이었다. 잠 잘 때도 자리에 눕지 않고 않은 채로 수행의 고삐를 늦추지않는 장좌불와(長坐不臥), 그 50여년의 오랜 수행에 "누워있으면 더 불편하다"던 스님이다.

스님은 이처럼 부단한 용맹정진의 모범을 보인 참 선승이었을 뿐 아니라 불교계가 혼돈할 때면 분연히 나서 중심을 잡아주던 큰 스승이었다. 깡 마르고 형형한 눈빛, 그러나 오랜 불와(不臥)로 제대로 곧은 척추라곤 한 마디도 없던 큰 스승의 육신은 깨달음의 흔적처럼 55년전 출가했던 해인사에 남겨졌다.

1946년 출가당시 인곡(麟谷)스님과의 문답은 선방(禪房)의 유명한 일화다. 인곡 스님이 물었다.

"어디서 왔느냐."

"아악-."

혜암은 당돌하게도 고승들이 말로 표현하기 힘든 크나 큰 깨달음을 가르칠 때 내뱉는 '할(喝.큰 고함)'로 대답을 대신했다. 빙긋 웃던 인곡 스님이 다시 물었다.

"이름이 무엇이냐."

"…."

혜암은 허공에 큰 원을 그렸다. 출가를 결심한 마당에 고향이나 이름 같은 세속의 인연이 무슨 소용 있겠는가. 인곡 스님은 출가를 허용했고, 혜암은 "출가하고 일주일만에 도를 깨치겠다"는 결심에 밤을 세워 참선하는 철야정진에 들어갔다고 한다.

비록 일주일만에 깨달음을 얻지는 못했지만 혜암 스님의 의지는 맹렬했고, 이듬해인 47년 해인사에 들른 성철(性徹.전 종정)스님으로부터 '결사(結社)'를 제의받고는 곧장 경북 문경 봉암사로 따라 나섰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한 치의 어긋남 없이 참선수행한다는 자세를 강조했던 이 '봉암사 결사'는 한국불교의 청정한 선맥(禪脈)을 자리매김했으며 이후 참선수행하는 절집 생활의 교과서가 됐다.

혜암 스님은 6.25전쟁으로 봉암사 생활이 불가능해지자 오대산으로 들어가 물과 잣나무 잎을 갈아 먹으면서 "죽기를 작심하고" 참선하는 등 상상을 초월하는 엄격한 수행의 길을 걸어왔다.

스님이 제자들에게 강조하는 다섯가지 가르침은 모두 이런 청정수행의 방도다. '공부하다 죽어라'외에 '밥을 많이 먹지 말라''남을 도와라''감투를 맡지 말라''일의일발(一依一鉢.옷 한 벌과 밥그릇 하나)로 살아라' 등이다. 모두가 욕심을 경계하는 말이다.

크고 작은 절집의 감투를 마다하며 평생 선방(禪房)에서 살아온 스님은 93년 성철 스님이 입적하자 비로소 뒤를 이어 해인총림 방장에 추대됐다. 이어 94년 조계종 원로회의 의장으로 추대됐다. 감투라면 감투랄 수 있지만 모두 정신적인, 혹은 상징적인 자리다. 주지나 총무원장 같은 행정적인 자리가 아니다.

스님의 목소리가 세속적으로 주목받은 것은 98.99년 조계종 분규 당시다.스님은 당시 종단을 흔들던 정화개혁측을 물리치고 기존의 법통을 지키는 쪽을 지지하는 확고한 자세로 분규의 확산을 막았다. 그리고 분규가 일단락된 99년 5월 종정의 자리에 추대됐다. 역시 정신적.상징적인 자리다. 현재 정대 총무원장 체제도 혜암 스님의 정신적 후원하에 출범한 셈이다.

오랜 고행(苦行)으로 건강이 좋지않아 지난해부터는 외부와의 접촉을 끊고 해인사 원당암에 칩거해왔다. 그리고 평생의 깨달음을 몇 마디 열반송으로 남기고 홀연히 떠났다.

오병상 기자

<혜암스님 연보>

▶1920년 전남 장성 출생.

▶46년 해인사에서 출가.

▶해인사 ·송광사 ·통도사 ·범어사 등에서 수행.

▶93년 해인총림 방장.

▶95년 용성(龍城)문도회장.

▶99년 조계종 제 10대 종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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