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 '선심 정책' 아르헨병(病) 재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8면

"일자리 1백만개 창출, 최저 임금은 두배 인상".

생활고에 찌든 서민들의 소요사태 직후 아르헨티나 임시 대통령에 오른 아돌포 로드리게스 사아의 취임 일성(一聲)이다.

페르난도 데 라 루아 전 대통령이 국제통화기금(IMF)의 요구대로 초긴축 정책을 추진하다 국민의 저항을 받아 물러나자 새 정권은 선심정책으로 국민들을 달래려 하고 있다.

공공근로 사업을 벌여 실업자들에게 3개월 정도씩 단기 일자리를 주고, 현재 월 2백페소(약 26만원)인 최저임금을 4백50~5백50페소로 올리겠다는 것이다. 동시에 재정적자를 줄이기 위해 전 정권이 결정했던 연금 13% 삭감조치는 없던 일이 됐다.

내년 3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이같은 선심성 정책은 앞으로도 다양하게 쏟아져 나올 것이라고 이곳의 비판론자들은 말한다. 아르헨티나의 '병'이 다시 도지고 있다는 지적이다.

1946년 후안 페론이 대통령에 당선된 후 부인 에바(에비타는 애칭)와 함께 펼친 대국민 선심정책은 아르헨티나 경제를 갉아먹은 주범으로 꼽힌다.

페론은 제2차 세계대전 중 곡물수출로 벌어들인 막대한 외화를 공장설립 등 생산적인 부분에 투자하지 않고 국민들의 복지후생을 위한다며 마구 써버렸다.

정치인들은 국가전략 수립은 뒷전으로 한 채 대중의 인기에 영합해 자리를 보전하고 부정축재를 하는 데 골몰했다.

노동자들은 생산성을 높이기보다 투쟁을 통한 임금인상에 더 관심이 많았다. 이런 것들이 어우러져 아르헨티나 경제를 회생불능으로 만들었다. 최대 일간지인 클라린의 국제부장 마르셀로 칸텔미는 "모든 것이 비관적이다. 희망은 찾을래야 찾을 수 없다"고 한탄한다.

이곳 사람들은 4년 전 국가 부도에 몰린 한국이 자력으로 IMF에서 빌린 돈을 다 갚고, 경제주권을 다시 찾은 것을 무척 부러워한다.

한국의 위기극복 사례를 본받아야 한다는 소리도 들린다. 우리가 아르헨티나 국민들의 본보기가 되는 것은 기분좋은 일이다. 동시에 우리도 아르헨티나에서 배워야 한다. 선심성 정책은 언제나 경계대상이라는 말이다. 내년에 두차례의 중요한 선거를 앞두고 있는 시점이라 더욱 그렇다.

주정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