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과학] '프리바토피아를 넘어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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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기본적인 식품의 세계총생산은 수요의 1백10%인데도 매년 3천만 명의 인구가 굶어죽고,8억 인구는 기아에 허덕이고 있다."

"1960년에는 세계의 최부유층 20%가 세계 최빈곤층 20%보다 수입이 30배 더 많았는데,오늘날에는 부유층 수입이 빈곤층 수입에 비해 82배로 늘어났다."

세계를 놀라게 한 테러와 전쟁은 말할 필요도 없다. 흔히들 장밋빛 21세기의 주역으로 꼽는 첨단 테크놀로지와 정보 혁명,유전자 조작과 인간 게놈프로젝트 등 새로운 기술의 개발은 인류를 행복으로 인도하는 급행열차가 될 것인가.

개인의 자유와 사회적 형평 사이의 긴장과 갈등은 인간이 무리를 지어 사는 한 고민할 수밖에 없는 영원한 주제다. 지난 세기 극단적으로 전개된 형평성의 강조가 사회주의권의 몰락 이후 추진력을 상실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자유의 무한확대가 몰고 올 사회적 비인간화에 대한 우려는 21세기를 맞아 기존의 이념적 대립을 넘어 새로운 해답을 모색하는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다.

영원한 주제에 대한 지성적 도전과 전 지구적 차원의 해답을 모색하는 작업은 미국 중심의 세계화를 반대하는 유럽쪽에서 더 진지하다. 그러나 아직 자유와 형평 사이 혹은 시장과 국가 사이에서 제3의 길을 찾아 내지 못한 어정쩡한 모색의 단계일 뿐이다.

『프리바토피아를 넘어서』는 이념의 대결이 사라진 이후에도 여전히 문제거리로 남아있는 사회적.국제적 갈등에 대한 유럽 좌파 지성인들의 고민을 생생하게 들어볼 수 있는 책이다.

이 책은 프랑스의 대표적 일간지 르몽드의 자회사에서 발행하는 국제문제 전문 월간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에 실렸던 글을 테마별로 묶어 펴낸 『21세기를 생각한다』의 한국어 번역판이다. 한국어판 제목인 '프리바토피아'는 책 중의 한 대목에서 뽑은 말로 영어 프라이비트(Private)와 유토피아(Utopia)를 합성한 용어다. 우리말로는 '사유화의 유토피아'를 뜻한다.

이는 마르크스의 사회주의가 실현될 수 없는 유토피아인 것과 마찬가지로 신자유주의적 유토피아 역시 인간의 현실을 무시한 무모함이 있음을 비꼬아 붙인 말이다.

지난해 가을 프랑스에서 첫 출간된 이 책을 관통하는 주제는 '새로운 밀레니엄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라는 것이다. 그 주제 속에서 인류가 직면한 사회경제적 변동의 명암과 과학기술의 급속한 발달에 따른 위험을 살펴보고,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해 나갈 것인가를 모색한다.

한마디로 상업과 기술의 윤리성에 대한 심각한 제고를 요청하며 이를 전지구적 차원에서 해결할 대안을 찾는 것이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의 주간을 맡고 있는 이냐시오 라모네(파리Ⅶ대학 커뮤니케이션학)교수를 비롯해 피에르 부르디외.펠릭스 가타리.노엄 촘스키 등 쟁쟁한 지성들이 필진으로 참여했다.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대한 비판적 논의를 필두로 생태계 파괴,유전자 조작,바이오테러리즘, 그리고 통신의 발달로 인한 새로운 통제사회의 도래, 인권과 제3세계의 부채 문제 등 인류를 새롭게 위협하는 요인들이 차례로 도마에 오른다.

그리고는 새로운 위협요인에 대한 새로운 대응방안으로 국제적 시민사회를 양성하자고 제안한다. 국민국가 단위를 넘어 '지구정부'역할을 하는 국제통화기금(IMF).세계은행.세계무역기구(WTO) 등에 맞설 국제적 시민사회의 연대를 조성하자는 것이다.

그런데 프랑스 지성들의 현실적 고민을 보여주는 이 책을 우리 입장에서는 조금 새겨 들어야할 측면도 간과해선 안된다. 미국 패권주의에 반대하고 있는 이들 또한 유럽중심주의와 자국 민족주의적 성격이 전혀 없다고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1954년에 창간된 '르몽드 디플로마티크'는 르몽드의 자회사지만 독립법인으로서 완전히 독자적으로 운영된다. 논조도 중도 좌파적인 르몽드에 비해 훨씬 더 진보적으로 공공연하게 미국적 지배 담론에 비판을 가하며 반패권주의, 반세계화를 표방하는 매체로 평가받는다. 프랑스에서만 매월 30만부를 넘게 발행하고,각국 언어로 번역돼 보급되는 양이 1백20만부에 달한다.

배영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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