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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격동의 시절 검사 27년 (20)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7면

20. 장흥지청으로 좌천

내가 서울지검장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강우영(姜友永)영등포지청장과 함께 서울지검장실에서 영등포구청 수도국 입찰비리 사건 관련자 구속을 주장했던 사실은 이미 영등포지청은 물론 서울지검에서도 더 이상 비밀이 아니었다.

'金모 검사가 검사장에게 항명(抗命)하고 대들었다'는 등 별 소문이 다 돌아다녔다.

하기야 검사장에게 건의하는 소리가 검사장 비서실까지 새 나와 결재를 기다리던 사람들이 다 들었을 테니 소문이 나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내가 이 사건 수사를 위해 서울지검장에게 항명했다는 신문 기사를 읽은 아버지께서 어느날 전화를 하셨다. 아버지는 "계란으로 바위 치는 일이니 참아야 한다. 정의의 실현도 한 사람의 능력만으로는 이뤄지기 힘들고 검사 한 사람은 거대한 강물의 물방울과 같이 아주 미미한 존재에 불과하다. 초임 검사로서 본분을 잘 알고 처신하라"고 말씀해 주셨다. 일생을 공직자로서 지내오신 아버지의 당연한 걱정이었다.

어쨌든 그 사건 때문에 내가 곧 좌천될 것이라는 소문이 검찰 내에 파다한 상태였다. 이미 각오하고 있었던 일이었다.

기자들이 검사장에게 "金검사가 항명한 것을 이유로 좌천당하면 가만 있지 않겠다"고 항의를 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 때문인지 그 해 가을 정기 인사때에도 나는 다른 곳으로 발령나지 않았다.

그런데 모든 것이 잠잠해진 다음 해 봄 정기인사때 나는 광주지검 장흥지청으로 발령받았다. 검사장의 지시에 고분고분하게 따르지 않았던 젊은 검사의 혈기가 결국은 좌천 인사를 당하는 원인이 된 것이다.

영등포지청 검사들은 물론 서울지검 일부 간부들도 검사장에게 항명한 것 때문에 좌천됐다는 것을 알고 나를 위로했다. 서울지검 김성재(金聖在)검사장도 영등포구청 수도국 입찰비리 사건 수사와 관련해 나를 좌천시켰다며 공개적으로 말하고 다녔다.

짧은 기간이지만 정이 들었던 영등포지청이었다.청사 설계 변경부터 정구장 설계,활발한 인지수사 활동 등 후회없이 젊음을 바쳐 일했던 시절이었다.

1972년 4월 12일자 발령이었다.

봄기운이 천지에 퍼지고 벚꽃이 만발하려는 봄날이었다.

姜지청장 이하 전 직원이 참석한 가운데 청사 지하실에서 송별회가 열렸다. 지청 직원은 물론 당시 검사 시보(試補)로 나와있던 사람들까지 참석한 뜻깊은 자리였다. 평검사가 전출가는데 전직원이 모여 송별회를 하는 것은 지금도 드문 일일 것이다. 별 잘못없이 억울하게 벽지로 좌천된 내 처지가 안타까웠던 모양이었다.

지하 구내식당에 막걸리와 안주를 차려 놓은 단촐한 송별연이었다. 나더러 송별사를 하라는데 무슨 말을 했는 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검사가 되기를 바라는 시보들에게 검찰에 대한 나쁜 이미지를 심어주지 않기위해서라도 비장한 이야기는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던 기억 뿐이다.

지청에서의 송별회를 마치고 김병리 부장,동기생인 유길선 검사와 영등포의 어느 요리집에 자리를 잡았다. 다음날 아침 영등포역에서 떠나는 장흥행 태극호를 타기로 돼 있었지만 밤이 새도록 술잔을 기울였다.

다음날 아침 역에 나갔더니 姜지청장 이하 전직원들이 영등포지청 버스를 타고 역에 나와 있었다. 지청 직원 뿐만 아니라 관내 경찰서장과 간부들도 다 나와 있었다. 평검사가 전출가는데 전 직원이 역에 나온 것도 흔한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스미스코로나 타자기 한 대만 달랑 들고 벽지로 떠나는 나는 마치 의로운 사람처럼 의연한 모습을 보이려고 노력했다. 그렇지만 환송 나온 여직원이 화환을 목에 걸어줄 때는 마침내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열차는 서서히 미끄러지기 시작했다.열차의 계단에 서서 환송객들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플랫홈에 선 직원들도 열차가 사라질 때까지 내게 손을 흔들어줬다. 내가 탄 기차는 유배지 전남 장흥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비행기와 고속버스 등에 익숙한 요즈음 젊은이들은 기차역에서의 이별때 느낄수 있는 독특한 분위기와 감정을 잘 이해하지 못할 것같다.

김경회 <전 한국 형사정책 연구원장>

정리=이상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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