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Better 라이프] 2001생활 최대 화두 '성'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9면

여성다움과 남성다움이라는 기존의 개념은 2001년을 기점으로 해서 무너졌다. 그 첫번째가 자신이 타고난 성을 바꾼 여자, 하리수의 등장이다.

TV와 라디오.영화 등의 인기 손님이 된 하리수의 활약은 성전환자(트랜스 젠더)에 대한 거부감을 잠재웠다.'장군감이네'라는 말로 대변되던 남자다움에 대한 칭찬은 여장군의 등장으로 의미를 잃게 됐다. 오히려 요즘 일부 젊은 남자들은 예쁜 남자,'꽃 미남'이 되기를 더 원한다.

여성들은 거칠어지고 있다. 기존의 잘못된 남성 상(像)을 그대로 답습하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거친 여전사들이 영화판을 휩쓸었다. 영화 '조폭 마누라'와 '엽기적인 그녀'는 달라진 여성상을 반영하면서 대박을 터뜨렸다.

남과 여 사이에 존재하던 완고한 성벽(性壁)이 깨진 2001년이었다.

*** 꽃미남

유통업계에서는 올해 히트 상품 키워드로 보보스(부르주아+보헤미안)와 테이크 아웃, 그리고 꽃미남을 꼽았다.

남성용 화장품과 핸드백 등 패션과 미를 추구하는 남자들을 위한 상품이 날개 돋친 듯 팔렸기 때문이다. 남성용 샤워 젤.보디 로션도 히트를 쳤다.

깨끗한 피부와 호리호리한 몸매, 찰랑거리는 머릿결을 가진 예쁜 남자들, 일명 꽃미남들의 등장이 두드러졌던 2001년, 거리에서도 TV에서도 꽃미남들을 만나기란 어렵지 않다.

헤어밴드를 한 예쁜 외모의 남성 가요 그룹 NRG, 날씬한 몸매와 매력적인 춤으로 광고에 등장해 많은 여성들의 사랑을 받은 탤런트 원빈 등 어느새 일부 남성들의 외모는 여성적으로 변해가고 있는 듯하다. 외모뿐 아니다. 성격에서도 터프하고 저돌적인 남자보다 섬세하고 부드러운 남자가 인기를 끈다.

전문가들은 이를 '여자들이 독립적이 되면서 생긴 현상'이라고 분석한다. 남성들에게서 자신이 의지할 수 있는 힘과 지위, 경제력을 요구하는 대신 아름다움 자체 만을 즐기고 싶어하는 독립적인 여자들의 출현 때문이라는 얘기다. 그와 함께 남성들도 남성다움이라는 미명 아래 즐기지 못했던 미적 감각을 노출시키기 시작한 것이다.

*** 터프걸

50명의 똘마니를 거느린 칼잡이 마누라를 그린 영화 '조폭 마누라'가 연말 영화가에서 대박을 터뜨렸다.영화 '신라의 달밤'의 김혜수도 조폭 대장에게 라면 심부름을 시키는 당차고 드센 여성이다.

올 여름 10대와 20대에게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던 영화 '엽기적인 그녀'의 여주인공 전지현도 "너 죽을래"를 입버릇처럼 하고 말보다 손이 앞서는 터프한 여성이었다.

1970, 80년대에 남성들의 전유물이었던 엽기적인 행동을 2001년엔 여성이 하고 있다. 안방극장도 사정은 마찬가지다."뭬야□"라는 앙칼진 목소리의 여인천하에서는 기세등등한 여성들이 국정을 주물렀으며,드라마 '아줌마'에서는 순종적이기만 하던 못난 아내가 씩씩하고 현명하게 독립을 일궈나갔다.

반면 남성들의 모습은 예전에 비해 약한 모습으로 비쳐지고 있다. TV나 영화에서 강한 아내.애인에게 구박받고 휘둘리는 코믹한 캐릭터로 등장하고 있다. 중.고교, 직장 등 현실 사회에서도 억세진 여성들의 모습을 흔히 보게 된다.

하지만 일부에서는 대중매체에 나타난 여성들의 모습이 한때의 흥밋거리용에 불과하다는 지적도 있다. 여성단체연합 조영숙 실장은 "아직 대다수의 여성들은 사회적 약자"라고 강조한다.

그렇더라도 강한 여성과 약한 남성의 모습이 큰 거부감없이 받아들여진 2001년이었던 것만은 틀림없는 현실이다.

*** 트랜스 젠더

지난 4월 남성의 상징인 목젖을 드러내며 여성 화장품 광고에 등장했던 성 전환자 하리수는 올해 가장 많은 관심의 대상이었다.

하리수의 등장과 함께 생소하기만 했던 트랜스 젠더도 전국민의 일반 상식 사전에 포함됐다.

타고난 성(性)을 부정하고 반대의 성으로 새로운 삶을 사는 트랜스 젠더는 분명 마이너리티(소수 그룹)지만 사람들이 이들을 보는 시선은 많이 너그러워졌다.

지난 8월 실시한 한국갤럽의 여론조사 결과도 트랜스 젠더를 인정해야 한다는 의견이 51%를 차지할 정도였다. 호적의 성별을 바꿔주자는 주장도 나왔다.

이와 함께 여성에서 남성으로 성전환한 시인 이문기씨도 출판업을 하는 보통 여자 김민경씨와 당당하게 공개 결혼식을 올렸다.

지난해 자신이 동성애자(게이)임을 선언함으로써 논란의 주인공이 됐던 홍석천씨가 TV 출연을 금지당하고 공식적인 방송활동을 접어야 했던 것과 대비되는 일들이다.

분명한 것은 우리 사회에 굳건하게 존재하던 성적 취향이나 성적 소수자에 대한 편견이 하리수의 출현을 계기로 무너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 여장군

지난 11월 육군본부 간호담당관 양승숙 대령이 장군으로 진급했다.

지난 4월에는 최초의 여성 차관이 등장해 직업공무원으로는 최고 지위에 올랐다. 1999년에 최초로 여성에게 개방된 해군사관학교와 공군사관학교의 올해 수석 입학생은 모두 여학생이었다.철도청에서는 올해 최초의 여성 역장이 탄생했다.최초의 여성 소방경, 최초의 예비전투기 조종사, 최초의 함정 근무 여성 해군이 나온 것도 올해였다.

이처럼 수많은 최초의 여성들이 등장했지만 올해 양승숙 장군의 등장은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장군=남성'이라는 고정관념을 깨뜨린 여장군의 출현은 2천4백여 여군들뿐 아니라 일반 여성들에게도 금녀의 벽이 사라지고 있다는 강력한 메시지가 됐다.

금녀의 직업이 없어지고 있는 것처럼 금남의 직업도 사라지고 있다. 여성들의 전유물로 생각했던 화장품 방문판매원에도 남자들이 등장했으며, 남자 파출부가 인기를 끌기도 했다. 여성의 경제활동 참가율이 50%대를 넘어섰고 전문직 여성들의 활동도 많아졌다.

하지만 아직까지 각 조직에서 의사 결정권을 가진 여성들의 수는 극히 적다. 여성 국회의원은 전체의 5.8%에 불과하고 여성 지방자치단체장은 더 적다. 기업체의 관리자급 여성 임원 수도 6%에 불과하다.

박혜민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