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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듀! 2001] 히트영화 주인공들 가상방담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53면

언제나 그랬듯 세밑 세상은 들떠 있다. 어지러운 한해였다. 언제쯤 마음 편히 한해를 떠나 보내려나. 그래도 함박웃음을 숨기지 못하는 이들이 있다.

영화계 인사들이다. 어느 해보다 관객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기 때문이다.'친구''엽기적인 그녀''조폭 마누라''봄날은 간다' 등 올해를 주름잡았던 영화 속 주연들을 가상의 자리에 모았다. 그들이 바라본 2001년은 어땠을까. 영화 속 대사들로 상상해 보는 맛도 괜찮을 듯 싶다.

안성기=(선배다운 예의 따뜻한 눈빛으로)수고 많았어. 여전히 정치권은 구린 돈냄새가 진동하고 경제는 먹구름이 잔뜩 끼어 심상찮아.

내가 출연한 '무사'처럼 사소한 이익에 눈멀지 않은 호걸들이 정치판에 많아졌으면 좋겠어. 다들 힘든 때 우리만 웃음보따리를 푸는 것 같아 미안하고 머쓱하네.

그래도 웃고 즐길 일 없는 각박한 일상에 활기를 불어 넣는 게 우리 일이니 그걸로 위로를 삼자구. 뭐니뭐니해도 올해는 '친구'의 해였지, 안 그래?

장동건=맞심더. 정말 마이 무따 아임니꺼(하하하). 전국에서 8백만명이 봤으니 기적 같은 일이지예.

유오성='친구'에서 내가 칼 쓰는 걸 보고 배워서 고등학생이 급우를 살해했다는 보도가 나왔을 땐 정말 당황스러웠어요. 꼭 그렇지만은 않을텐데….

안성기=조직폭력배 다룬 영화가 너무 많이 나온 것 같긴 해.

신은경=난 조폭 얘기만 나와도 깜짝 깜짝 놀란다니까. 흥행에 성공하면 뭐해요. 욕 엄청 먹었잖아요.'조폭 마누라'같은 영화가 한국 영화계를 좀 먹는다나?아니 왜 '조폭마누라'만 갖고 그러는 지 몰라.

여태껏 남자 조폭들 앞에서 '꿇어'라고 외친 여자 보셨어요. 지방 관객들은 극장 매표구에서 '꿇어'표 주세요 했다잖아요.

안성기=사실은 무슨무슨 게이트가 터질 때 묶여 나오는 정치권과 조폭들이 더 문제겠지. 영화는 현실의 반영이고 사회의 축소판이잖아.

박중훈=참, 동건이 니도 할리우드 가려고 영어공부 한다며. 그래 열심히 해라. 배우는 큰 물에서 놀아야 된다. 내가 할리우드에서 영화 찍을 때 조너선 드미 감독이 니 얘기하더라. 얼굴 잘 생겼다고.

유오성=중훈이 형, 꼭 미남이라야 배우하는 거 아니에요. 내처럼 개성이 분명해야죠.

박중훈=아이고 미안하다. 그런 뜻이 아니었어.

장동건=원래 9월에 뉴욕에 어학연수 가려다가 못 갔잖아요. 뉴욕 테러사건때문에요.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아프고 당시 장면이 눈에 선해요.

안성기=그래, 아무리 목적이 정당해도 무고한 인명을 앗아가는 테러는 인류의 적이라는 게 이번에 분명해졌지.

농담이지만 뉴욕테러 때문에 '무사'가 손해 좀 봤지. 워낙 충격적인 장면이라 사람들이 TV 앞에만 몰려 있었으니까. 아무튼 우리도 영화를 통해 인간성을 함양하는 가치를 많이 보급해야 할 거야.

최민식=그런 면에서 '파이란'은 내가 주인공 맡아서 그런 게 아니라 정말 괜찮은 영화였지. 아무리 어려운 조건에서도 서로에 대한 믿음과 사랑이 얼마나 중요한가, 뭐 그런 메시지였는데 관객이 안 들어 안타까웠어.

안성기=그래 나도 봤는데 좋은 영화더라.

최민식=그리고 할리우드도 좋지만 동남아 시장도 만만치 않아. '파이란'에 출연한 중국 배우 장바이쯔(張栢芝)도 그러대. 현지에서 한류(韓流)바람이 대단하다구. 내 연기 하는 걸 보더니 중국에서 뜨겠다는데?헤헤헤, 내 자랑하려니 쑥스럽구먼.

안성기=그래 영화뿐 아니라 드라마.가요 등도 큰 인기인 모양이더라. 이런 기회를 잘 활용해야 할 텐데, 듣자하니 관리를 못해 인기가 조금씩 시드는 기색이라는 말이 있어 걱정이야. '봄날은 간다'는 홍콩에서 개봉했다지?

유지태=예. 일본에서도 곧 개봉 할 거래요.

안성기='봄날은 간다'는 '사랑이 변하니'라는 말을 유행시켰지?

유지태=저보고 너무 순진해서 요즘 저런 남자가 어디 있느냐고 하는 사람도 많았죠. 대신 이영애씨는 순진한 남자 힘들게 한다고 욕 좀 먹었죠?

이영애=그건 사랑에 실패하고 이혼한 여자의 심리를 모르고 하는 얘기에요. 한국사회에서 결혼이란 개인 대 개인이 아니라 다른 가족과 묶이는 일이잖아요.

그래서 홀아버지를 모신 유지태씨가 결혼하자고 나올 때 제가 한 발 뒤로 빠지잖아요. 시댁문제, 명절 때 여자들 힘든 문제 등 아직 우리 사회는 남성중심이에요.

전지현=남성중심요? 난 이해 못해요.'엽기적인 그녀'에서 제가 차태현이 꼼짝 못하게 하는 거 보셨죠?

안성기=요즘 남자애들 너무 패기가 없는 거 아니냐.

차태현=선배님, 그런 말하면 쉰세대라고 손가락질 당해요. 제 또래 젊은 남자들은 여자들한테 군림 안해요. 연상의 여성에게 귀여움 받는 것도 좋아하구요.

(박중훈.유오성.최민식, 한 목소리로) 야 말세다, 말세.

신은경=(발끈하며)여자 조폭 두목이 나오는 시대에 모르는 소리들 하시네. 쯧쯧 걱정이야.

이성재=확실히 요즘은 가치관이 뒤바뀌는 시대 같아요. '신라의 달밤'에서도 고등학교 때 수석하던 학생이 깡패 되고 주먹 쓰며 말썽 피우던 애가 교사가 되잖아요.

차승원=그건 좀 극단적인 이야기지만 '신라의 달밤'에서 교사 역을 해보니 요즘 학교 교육 심각한 거 실감나데요. 거기에다 올해는 수능이 어렵게 출제됐다해서 학생들이 난리였죠.

안성기=교육은 정말 해법을 찾기가 쉽지 않은가봐. 그래서 돈 좀 있으면 너나없이 조기유학을 떠나니 말이야.

(열띤 토론에 다소 어수선한 분위기. 그러자 박신양이 긴급 제안을 한다)

박신양=오랜 만에 모였는데 369게임이나 합시다. '달마야 놀자'때문에 이 게임 엄청 떴는데.

(박신양의 '썰렁한' 제안에 잠시 멈칫한 분위기. 그러나 곧 호의를 갖고 대하는 선후배들. 이렇게 서로 감싸주고 위해주는 분위기 때문에 한국영화가 잘 되는 게 아닐까. 한국 영화계가 거둔 쾌거가 내년 월드컵으로, 정치.경제로 확산되길 기대해본다)

신용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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