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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헌법재판과 여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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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2004년 한국 사회는 헌법재판소의 힘을 실감했다. 대통령 탄핵 기각 결정과 수도 이전 위헌 결정은 헌법재판이 얼마나 큰 정치적 위력을 지닌 정치적 재판인지를 분명히 보여주었다. 특히 수도 이전 위헌 결정은 정치권력의 핵심적 이해가 걸린 사건에서 헌재가 집권자의 손을 들어주지 않은 최초의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위의 두 결정은 결론의 정치적 방향에서 상반되지만 하나의 중요한 공통점을 갖고 있다. 그것은 두 결정 모두 각각의 사안에 대한 다수 여론의 방향과 일치하고 있다는 점이다. 재판관들의 결정 과정에서 여론의 향배가 실제로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헌법재판에서 여론이 지니는 의미가 무엇인지는 간단치 않은 문제다. 여론을 존중해야 하는가, 무시해야 하는가, 또는 그 어느 것도 아닌가.

이 문제와 관련해 미국 연방대법원의 한 판례를 보자. 태평양전쟁 중 미국 서부 연안에 거주하는 일본계 미국 시민이나 거주자들을 강제수용한 군 당국의 조치에 대해 대법원은 합헌 판결을 내렸다(1944년의 Korematsu 판결). 당시 군 당국의 조치에 대해 여론은 절대적인 지지를 보냈다. 이 조치를 공개적으로 비판한 집단은 퀘이커 교도뿐이었다. 판결은 전시의 급박한 상황을 강조했지만, 이를 뒷받침했던 군 당국의 문서들은 상당 부분 조작됐다는 사실이 후일 드러났다. 이 판결을 썼던 블랙 대법관은 그 후 60년대 대표적인 진보적 대법관으로 명성을 떨친 사람이다. 여론에 충실했던 이 판결은 미국 대법원의 역사에서 부끄러운 오점으로 남아 있다. 반면 이 사례와 역(逆)인 경우도 있다. 흑인학교와 백인학교의 분리에 대해 위헌 판단을 내림으로써 미국 대법원 역사에 금자탑을 남긴 54년의 브라운(Brown) 판결은 여론을 반영한 것이 아니라 여론을 일깨운 판결이었다. 이 같은 사례들은 여론이 결코 헌법판단의 기준이 될 수 없다는 예증이 된다.

모든 국가권력이 그렇듯 헌법재판권 역시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며 헌법재판은 국민의 의사에 따라야 한다. 그러나 그 국민의 의사는 그때그때의 여론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헌법재판이 따라야 할 것은 부침하는 여론과 구별되는 '진정한 국민의 의사'이며, 그것은 '헌법 속에 나타나 있는 국민의 의사'다. 과연 그것을 찾아내는 과정은 어떤 것인가. 워터게이트 사건의 특별검사를 맡았던 아치볼드 콕스는 여기에 대해 미묘하면서도 적절한 표현을 준다. 미국 대법원의 정치적 역할에 관한 강연집의 말미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헌법재판은 미묘한 공생관계에 의존한다고 생각한다. 대법원은(미국에서는 대법원이 최종적 위헌심사권을 갖는다:필자) 우리가 우리 자신을 아는 것보다 우리를 더 잘 알지 않으면 안 된다. 대법원의 판결문은 때때로 영혼의 목소리이며, 이것은 보다 나은 우리 자신을 일깨워준다. … 그러나 그 판결의 뿌리는 이미 국민 속에 있지 않으면 안 된다. 대법원의 목소리를 통해 나타나는 열망들은 다음과 같은 것, 즉 공동체가 기꺼이 다짐할 뿐 아니라 종국에는 그것에 따라 살려는, 그러한 열망이어야 한다. 큰 헌법 판결들의 정당성은 그러한 공동의 의지를 대법원이 얼마나 정확히 지각하느냐는 지각의 정확성, 그리고 이 지각의 표현을 통해 궁극적으로 합의를 이끌어낼 수 있는 대법원의 능력에 달려 있다."

우리의 헌법재판소는 적어도 2004년 이전에는 국민의 사랑 속에 대체로 평화의 시간을 누려온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올해의 탄핵사건에서 긴장의 시간을 맞이하기 시작했고, 급기야 수도 이전 위헌 결정을 통해 종래의 '제한적 적극주의'를 벗어나 '정치적 성년'에 이르게 되었다. 성년이 되면 자립의 능력을 요구받고 책임이 따르게 마련이다. 이제 헌법재판소의 미래는 '우리보다 우리를 더 잘 아는 지각능력'과 '궁극적인 합의 도출 능력'을 갖추느냐에 달려 있다. 그러한 능력을 갖추려면 우선 재판관들이 지명권자의 정치적 성향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할 것이다. 현 재판관 9명 중 내년에 1명, 내후년에 5명이 임기를 마친다. 그 후의 헌법재판소 모습이 어떠할지 벌써 궁금하다.

양건 한양대 교수·헌법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