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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격동의 시절 검사 27년 (17)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0면

7. 영등포지청 발령

강경에서 2년 6개월간 근무한 나는 신설된 서울지검 영등포지청(현재의 남부지청)으로 발령받았다. 그 때 서울지검 성동지청(현재 동부지청)과 성북지청(북부지청), 그리고 영등포지청이 새로 문을 열었다.

나는 신설 검찰청인 영등포지청으로 발령받은 데다 새로 지은 여의도 시범아파트로 이사를 해 들뜬 마음에 의욕이 넘쳤었다.

그러나 내가 발령받았을 때 영등포 지청 청사가 아직 마련되지 않고 있을 때였다. 중앙일보사 구 사옥 건너편 중구 순화동에 있던 옛 가정법원 자리에 임시청사가 마련됐고 영등포구 문래동에 새 청사를 신축하기 위한 기초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정식 발령 일자보다 며칠 앞서 우리는 다 헐어 빠진 구 가정법원 건물에 모였다.

지청장은 강우영(姜友永.전 서울검사장.대법관), 부장은 金秉離(전 대검 특별수사부장.치안본부 3부장).이기형(작고)씨 였다. 정해창(丁海昌.전 법무부장관, 청와대 비서실장).김형표(金炯杓.변호사), 나와 고등고시 동기생인 유길선(柳吉善.전 감사위원), 고시후배인 유재성(柳在成.전 광주지검장)검사등이 있었다.

지금의 남부지청과 비교하면 상대도 안되는 규모였다. 영등포지청은 그 당시 함께 개청한 성동지청과 검사 숫자 등 규모에서 모든 것이 같았다.

영등포지청 관할 경찰서는 영등포.노량진.안양 세 곳이었다. 수원지검이 본청으로 승격되기 전이었기 때문에 안양이 영등포지청 관할이 된 것이었다.

동시에 출발한 서울지검의 3개 지청-영등포지청, 성동지청과 성북지청-은 경쟁관계에 있었다. 청 운영을 비롯해 수사활동에 이르기까지 불꽃 튀는 선의의 라이벌 의식이 대단했었다.

특히 김병리 부장검사는 자타가 공인할 정도로 의욕에 찬 분이었다. 검찰에 처음으로 타자를 이용해 조서를 작성토록 만든 분으로 모든 직원에게 타자연습을 독려했다.

당시 타자의 도입은 지금의 컴퓨터 도입에 버금가는 혁명적인 사무 자동화의 시작이었다.

청장 이하 전 직원이 타자 기술을 익히느라 여념이 없었다. 일부 나이 든 직원들의 불만에도 불구하고 검사들이 지청장실에 둘러앉아 타자 연습을 하던 추억은 당시의 사진 한 장에 서려 있다.

당시 체인스모커였던 정해창 검사가 담뱃재가 곧 떨어질 듯한 담배꽁초를 입에 물고 타자 연습에 몰두하고 있는 장면은 인상적이다.

검사와 직원들의 타자 교육을 독려하기 위해 열린 청내 타자 경연대회에서 내가 검사 중에서 1등을 했다. 상패와 함께 받은 부상은 금성사의 트랜지스터 라디오였는데 요즘으로 치면 텔레비전 한 대에 해당하는 귀중한 상품이었다. 상품보다도 다른 사람과 같이 시작한 타자 교육에서 내가 1등을 한 것이 뿌듯하기만 했다.

영등포지청에서의 생활은 활기에 차 있었고 상사들의 신임도 두터웠다. 하루는 연락을 받고 姜지청장실에 갔더니 부장 두분도 함께 있었다.

姜지청장은 "앞으로 金검사에게 경찰이 보낸 사건(송치 사건)은 배당하지 않을 테니 '인지 수사(검사가 정보를 수집해 직접 수사하는 것)'만 하라"고 지시했다.

지청에 지금과 같은 특수부가 없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姜지청장과 부장들이 상의해 검사 한 사람이 인지 수사에 전념할 수 있도록 했다는 것이다.

나는 "아직 경력도 얼마 되지 않고 손발이 없어 곤란하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姜지청장과 부장들은 심사숙고 끝에 결정한 일이니 수고해 달라며 내 말을 일축했다.

자세한 설명은 없었지만 짐작컨대 성동.성북 지청과의 경쟁에서 이기기 위한 간부들의 고육지책(苦肉之策)이라는 생각이 들어 끝까지 거절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金검사가 관내 경찰에서 유능한 형사들을 1명씩 차출해 함께 일하라"는 지시도 있었다. 사실 관내 형사 3명을 차출해 수사를 시작해도 얼마나 효율적으로 수사를 할 수 있을 지 걱정이 태산같았다. 어쨌든 3명의 형사를 파견 받아 인지수사를 위한 범죄정보 수집을 시작했다.

그러나 형사들이 수집해 오는 정보 중 그렇게 쓸만한 것은 없었다. 상부의 기대에 미치지 못할 것 같아 점점 초조해지기 시작했다.그렇지만 나름대로 노력한 덕분인지 그럭저럭 성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김경회 <전 한국 형사정책 연구원장>

정리=이상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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