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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산 선사를 추모하며] '제3의 불교'시대 여셨는데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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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지난달 30일 입적한 숭산(崇山.화계사 조실)스님은 선사(禪師)답지 않게 해마다 나에게 연하장을 보내왔다. 이제 그 거칠거칠한 글씨의 연하장을 받을 수 없다. 1950년대 말 나는 서울 동대문 밖 탑골승방에 잠시 머물고 있는 숭산 스님을 찾아갔다. 그때가 효봉.동산.청담.경산 스님들의 불교정화 노력이 열매를 맺어 통합종단이 실현될 무렵이다. 나는 종단에 참여하기를 간청했다.

61년 스님은 조계종 총무원 총무부장에 취임, 어려운 고비의 종단을 이끌었다. 그 전 해에는 불교신문을 창간해 불교언론의 효시를 날렸다. 서로 속내를 트는 사이였다. 그 뒤 스님은 해외로 떠났고 나는 세속으로 떠났다. 80년대 후반 내가 버클리대에 갔을 때 미국 전역에 걸친 스님의 영향력을 눈으로 확인했다. 그 때부터 나는 숭산 선사를 마음 깊이 종정(宗正)으로 추대하고 있다. 불교의 시작인 소승시대 이래 대승불교 시대를 거쳐 이제 스님을 통해 제3의 신승(新乘)불교시대가 열린다고 보았다.

한국 조계종의 법맥(法脈)은 냉정하게 보자면 중국 남종선을 계승한다. 이는 인도의 여래선이나 종국 북종선조차 배척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스님은 모든 구분을 넘어선 종합적 수행방법으로 세계 각 지역 20세기 선 불교를 전개해 왔다. 심지어 점수(漸修)교육도 실시했다. 근기(根機.사람마다 가진 능력의 차이)가 위 아래만 있는 것이 아니라 무수하게 다양하다는 사실을 간파한 것이다.

물론 그 연원은 중국 임제 선사의 가풍이다. 또 한국 덕숭 문중의 가풍이다. 근대 한국의 선맥을 중흥한 경허.만공의 체질이 그럼으로써 스님에게도 몽땅 드러나고 있다. 하지만 만공이 제창한 '세계일화(世界一花)'를 한 몸에 구현한 그 자신이 '세계의 한 송이 꽃'이기도 하다. 바로 이 점이 세계 35개국에 120여개 선원을 개설하고 불제자 5만여명을 낳게 한 것인지 모른다. 한국에서는 국내 기반이 취약할 수도 있는 원로 선사이지만 세계 속에서 그는 몇 사람과 함께 전 지구적인 구루(영적 스승)인 것이다.

스님은 '오직 모를 뿐'이라는 공안 하나를 내보였다. 몇해 전 숭산법어전집 간행회에서도 스님은 이 말로 끝맺었다. 지난 날 스님은 최면술에도 능했다. 산적을 물리칠 담력과 완력도 있었다. 은사인 고봉 선사의 법맥에 요청되는 치열성도 자자했다. 하지만 그는 선방의 냉기가 아닌 보살의 자비를 갖췄다. "다, 걱정 말아라. 만고광명(萬古光明) 청산유수(靑山流水)라." 누구누구의 임종게보다 멋지다.

고은<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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