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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 질긴 생명력 '분지' 새 단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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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 남씨는 "역사성이 반영돼야 훌륭한 작품이 나온다. 역사적 소양을 키우기 위해 작가들은 인문학을 공부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상선 기자

한 문학작품이 40년의 세월을 견뎌내며 생명력을 유지하는 것이 흔한 일은 아니다. 소설가 남정현(71)씨가 1965년 월간 문예지 '현대문학' 3월호에 발표한 단편소설 '분지(糞地)'가 그런 작품이다.

발표 당시만 해도 파격적으로 비쳤던 '반미(反美)'적 내용은 한국 현대문학사의 대표적인 필화사건으로 이어졌다. 때문에 '분지'를 포함, 61년 남씨에게 동인문학상을 안긴 중편 '너는 뭐냐' 등 중.단편 14편을 묶은 '남정현 대표소설선집'(실천문학)이 최근 출간된 것은 반갑다.

지난 주말 남씨는 "최근 대학에 자리잡은 젊은 교수들이 학생들에게 내 얘기를 가끔 하는 모양이다. '어디서 '분지'를 구할 수 있느냐'는 문의전화를 심심치 않게 받는다"고 말했다. "그래서 작품들을 직접 선정해 묶어 내게 됐다"는 것이다.

선집에 실린 작품들은 '명불허전(名不虛傳)'이라는 말을 실감케 한다.

'분지'는 홍길동의 10대손 홍만수라는 가공의 주인공이 죽은 어머니에게 자신이 처한 사정을 토로하는 형식을 빌려 일본을 대신해 남한에 진주한 또 다른 외세 미국을 성토하는 내용이다. 홍만수의 어머니는 해방 직후 미군에게 강간당했고, 여동생 분이는 한국전쟁 후 미군 상사 스피드의 첩으로 전락했다. 홍만수는 마침 한국을 찾은 스피드의 미국인 부인을 욕보이는 것으로 손상된 자존심을 위로한다. 거침없는 표현과 허를 찌르는 발상 등은 지금 읽어도 여전히 강렬하다.

'분지'는 발표 후 한동안은 괜찮았다. 그러나 65년 5월 북한 노동당의 기관지 '통일전선'에 전재되면서 문제가 되기 시작해 7월 반공법 위반으로 남씨가 구속되고, 작품은 80년대 중반까지 금서로 묶인다. 이어진 법정공방은 큰 논란을 불렀다. 증인으로 나선 문학평론가 이어령은 작품의 용공성을 묻는 검사의 질문에 "그것은 달을 가리키는데 보라는 달은 안 보고 손가락만 보는 격"이라고 반박해 화제를 낳았다. 증인으로 나선 한 남파간첩은 '분지'의 내용이 북한의 악선전을 대변하고 있다고 인정하면서도, 이런 소설이 허용되는 대한민국은 자유스럽다고 답했다.

남씨는 "'분지'는 색채로 따지자면 역사상 가장 현란하고 황홀한 순간이었던 4.19가 5.16에 의해 허망하게 무너져내렸을 때의 비통함.좌절감이 동력이 돼 쓴 소설"이라고 밝혔다. "반드시 미국을 타도의 대상으로 삼았다기보다는, 힘이 곧 정의이고 선이라는 당시의 지배적인 생각에 맞서 윤리적인 문제를 제기한 것이고, 가장 큰 힘을 가진 주체로 미국을 상정한 것일 뿐"이라는 것이다.

어쨌든 남씨의 작가 인생은 '분지' 사건으로 큰 타격을 받았다. 그는 "막 달려나가는 달리기 선수를 다리 걸어 엎어뜨리자 다시 일어나 뛸 기력을 잃었다"고 말했다. 특히 "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두번째 옥고를 치르고부터는 어지럼증이 심해져 작품을 제대로 쓸 수 없었다"고 토로했다. 남씨의 작품은 콩트.에세이까지 모두 합쳐 42편에 불과하다. 95년 이후로는 작품을 한편도 쓰지 못했다. 그는 "요즘도 현기증이 심한 날은 신경안정제를 복용한다"며 "앞으로 건강이 허락해준다면 민족문제나 남북한 통일을 다룬 작품을 쓰고 싶다"고 말했다.

신준봉 기자 <inform@joongang.co.kr>
사진=김상선 기자 <ssk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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