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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엔 아직 희망이 있습니다"…신간 '에필로그' 출간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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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1면

"나는 죽음과 여섯 번 대면했다. 그때마다 죽음은 나를 외면하고 지나갔다. 물론 언젠가는 다시 찾아올 것이다. 누구도 예외일 수는 없다. …나는 인간의 역사 위에 부각된 희망적인 흐름과 걱정스런 경향들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를 보고 싶다.

가령 과학기술의 가능성과 위험, 여성 해방, 중국의 정치.경제.기술적 진전, 우주 비행 등이 그 예다. 사후 세계가 있다면 내가 언제 죽음을 맞이하든 이러한 나의 호기심과 갈망은 충족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죽음이 꿈도 없는 깊은 잠과 같은 것이라면 이것은 쓸쓸한 소망으로 끝날 것이다. 아마도 이러한 생각이 계속 살고 싶다는 좀더 특별한 동기를 부여했으리라 짐작해 본다."(『에필로그』 3백28~3백29쪽)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사랑했던 천문학자 칼 세이건(1934~96).

대중적 과학서의 고전 『코스모스』와 같은 제목의 TV다큐멘터리로 지구인에게 우주에 대한 상상력과 도전정신을 북돋아주었던 그가 백혈병으로 사망한 지 5주기를 맞아 세 편의 저작물이 나란히 국내 출간됐다. 영화로도 만들어졌던 SF소설 『콘택트』(전 2권)와, 『코스모스』의 후속편격인 『창백한 푸른 점』의 개정판, 그리고 유작 에세이집 『에필로그』다.

특히 『에필로그』(원제 Billions & Billions)는 위와 같이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인류와 우주에 대한 애정어린 호기심을 버리지 못했던 세이건의 철학, 삶의 방식 등을 보여준다.

사람들에게 우주의 신비와 이 세계의 아름다움을 알리는 '과학의 전도사' 역할은 그가 스스로에게 부여한 사명이자 견딜 수 없는 욕구가 아니었을까.

『에필로그』 역시 '수와 우주의 아름다움'에 관한, 과학자다운 순수한 찬양의 글로 시작된다. 세이건은 자신이 만든 유행어처럼 돼버린 '수십억의 수십억(billions and billions)'이라는 말에 얽힌 에피소드에서부터 페르시아 체스판의 유래, 스포츠에 열광하는 사람들, 그리고 수도꼭지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등 가벼운 소재를 들어 수학과 과학, 그리고 우주에 대한 일반인들의 지대한 관심을 호소한다.

인도의 산술법, 지수 계산법은 물론 각종 통계와 그래프들도 등장하지만, 그런 딱딱한 소품들마저 자연스런 글의 일부로 만드는 것이야말로 퓰리처상 수상자이기도 한 세이건의 능력이다.

이전에 다른 잡지들을 통해 발표했던 글들이 섞여 있는 2부와 3부는 보다 정치적 색채가 짙다. 환경문제를 비롯, 미국과 소련 등 강대국들이 벌인 전쟁과 무기 개발의 역사, 낙태 논쟁 등에 관한 주장을 펼쳐놓고 있는 것이다. 휴머니스트 세이건의 면모를 볼 수 있는 부분이다.

그는 우선 오존층 감소와 지구 온난화 현상 등 생태계를 파괴하는 과학기술문명의 폐해를 경고한다. 그리고 "환경 문제에 안심하는 낙관론자들의 본질은 소심함이다.

그들은 권력자들과 맞서기를 두려워하고, 환경을 약탈하여 이익을 얻는 사람들에게 안심을 구걸하며 살아간다.우리는 서둘러야 한다.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오기 전에 상황을 돌이켜야 한다"(1백17쪽)고 강조한다.

세이건은 지구 환경의 전면적인 악화가 단지 이윤에 굶주린 자본가들이나 무원칙하고 타락한 정치인들만의 잘못은 아니라고 말한다.

너무 쉽게 행정 수뇌부와 공무원들에게 파괴의 권력을 일임한 과학자 종족, 그리고 우리가 신에게 복종해야 하는 것처럼 자연은 우리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주장해온 종교 집단에도 큰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본질적으로 낙관적이다. "인간은 벼랑 끝에 몰렸을 때 영특함을 발휘하는 종(種)이다. 내 생각이 옳다면 우리 시대의 환경 문제는 모든 국가와 모든 세대를 묶어주는 끈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기적이었던 인간의 기나긴 유년 시절도 비로소 막을 내릴 것이다"(2백10쪽)라면서, 인류가 협력을 통해 재앙을 예방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보인다.

그의 부인 앤 드루얀이 쓴 서문과 마지막 4부는 그의 다른 저작들에선 보기 힘든 가장 개인적인 기록이다. 세이건 부부의 만남과, 세이건이 심각한 병에 걸린 사실을 알게 되면서부터 가족의 사랑 속에 눈을 감기까지의 상황이 절절하게 담겨 있다.

죽음을 앞둔 세이건은 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다음과 같은 말을 통해 인간과 신의 존재에 대한 자신의 소신을 밝힌다.

"나는 자신의 피조물에게 상벌을 가하거나 우리 자신과 똑같은 의지를 소유하는 신을 상상할 수 없다. 나는 또한 육체적인 죽음을 뛰어넘어 생존하는 인간을 상상하고 싶지도 않다. 나약한 영혼들이 공포와 부조리한 이기심에 사로잡혀 그런 생각에 집착한다.

나는 영원한 생명을 신비로서 받아들이는 것에 만족하며, 현존하는 세계의 경이로운 구조를 언뜻 보는 것에 만족한다. 그리고 자연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이성의 아주 작은 부분이나마 이해하기 위해 나의 모든 노력을 바치는 것에 만족한다."

책이란 대단한 문명의 도구임을 다시금 깨닫는다. 5년 전 죽은 인물과 이렇게 의미있는 '콘택트'를 가능케 해주다니!

세이건의 정치적 주장이나,과학의 힘에 대한 근본적인 믿음, 그리고 제3세계 현실에 대한 인식 등에 대해선 할 말도 적지 않으리라.

하지만 거대한 우주 속의 '창백한 푸른 점'에 불과한 지구, 그리고 그 46억년 된 지구에서 겨우 수백만년 역사를 지닌 인류의 모습을 되돌아보고, 평화로운 공존과 우주에 대한 도전을 촉구하는 그의 말에 먼저 귀기울여 보시길….

김정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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