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대 국왕들 업적 뚜렷, 탁신도 겉으론 “죽을 때까지 충성”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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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호 11면

입헌군주인 푸미폰 아둔야뎃 국왕이 현실정치에 개입할 수 있었던 요인은 여러 가지다. 재위 중 20여 차례의 군사 쿠데타로 인해 역대 정권의 정통성이 취약한 정치 환경도 작용했지만 국왕이 가진 개인적 자질, 국민에 대한 봉사와 자선, 왕실에 대한 국민적 신뢰라는 내재적인 요인을 무시할 수 없다. 여기서 한 가지 간과할 수 없는 것은 라따나꼬신(짜끄리) 왕조의 역대 국왕들이 쌓아 온 뛰어난 치적이 푸미폰 국왕의 정치적 자산으로 작용했다는 사실이다.

푸미폰 국왕의 정치적 자산은

1932년 입헌혁명으로 절대군주제가 붕괴됐지만 라따나꼬신 왕조는 220년 이상 단절 없이 정당성을 지켜 왔다. 라마 4세 몽꿋 국왕, 라마 5세 쭐랄롱꼰 대왕은 근대화와 외교 정책의 성공으로 서구 제국주의의 침탈을 막아 내고 독립국의 위상을 지켜 냈다. 주변국인 미얀마·라오스·캄보디아·베트남 등이 모두 영국과 프랑스의 식민 지배를 받았지만 두 명의 탁월한 개명군주는 풍전등화의 운명에 놓인 나라를 지켜 내는 신화를 만들어 냈다. 태국은 서구 열강과의 불평등조약 체결의 불리함을 감수하면서 ‘짜끄리 대개혁’을 통해 근대화를 성공시켰다. 또 영토할양 정책을 추진해 독립을 보존했다.

라마 6세 와치라웃 국왕은 제1차 세계대전 막바지에 프랑스에 소규모 원정대를 파견해 전후 국제사회에서의 입지를 확고히 하는 외교적 발판을 마련했다. 이어 서구 열강과 체결한 불평등조약을 폐기해 확실한 주권국가의 면모를 갖췄다. 절대왕조의 마지막 국왕이었던 라마 7세 쁘라차티뽁은 절대군주제를 지켜 내는 데 실패했지만 스스로 헌법을 제정해 군주의 절대권력을 축소시키고 민주적 정치 시스템(입헌군주제)으로의 체제 변화를 시도했다.

체제 변화 시도는 라마 5세 때 사실상 시작된 것이다. 당시에 일부 왕족은 입헌군주제 개혁안을 시기상조라는 이유로 거부했고, 라마 6세 때는 일부 소장파 장교가 입헌군주제를 목표로 하는 쿠데타를 일으켜 실패한 일도 있었다. 하지만 절대군주들이 통치체제 변경 의지를 갖고 있었다는 사실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

이런 역사 속에서 라따나꼬신 왕조의 정당성은 높아졌다. 1932년 입헌혁명으로 절대군주제가 붕괴된 뒤에도 태국인들의 왕실에 대한 신뢰는 여전해 혁명주체들의 왕실 약화 시도는 성공할 수 없었다. 그래서 반정부 시위의 배후로 지목되는 탁신조차 겉으론 “나와 내 가족은 죽을 때까지 국왕에게 충성할 것”이라며 “내 지지자들이 국왕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도록 할 것”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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