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패자만 있는 게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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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신승남 검찰총장 탄핵안 처리 무산에 따라 연말 정국이 급랭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보면 이 게임은 모두가 룰을 지키지 않았고, 그 결과 승자는 없고 패자만 있는 게임이 되고 말았다. 모두가 얻은 것은 없고 잃은 것만 많은 게임을 벌인 것이다. 어디서부터 문제가 꼬였는지 복기(復碁)해보자.

*** 탄핵보다 예산 심의 급해

우선 법리상으로나 정치적으로 볼 때 이번 탄핵안은 상정되지 않는 것이 좋았다. 그동안 愼총장과 검찰이 보여준 각종 의혹과 불공정성을 생각할 때 한나라당이 탄핵안을 제출한 심정은 충분히 이해된다.

그러나 검찰총장은 헌법과 법률상 탄핵대상이 아니라는 주장이 있는 만큼 한나라당은 탄핵 발의에 앞서 보다 신중한 법리검토를 거쳐야 했다. 일의 순서 면에서도 한나라당은 탄핵 문제보다 이미 시기를 놓친 예산안이나 민생법안에 대한 심의를 먼저 했어야 했다.

탄핵안이 통과되건 않건간에 그 결과는 정국의 냉각으로 갈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 시점에서 한나라당이 정국을 얼어붙게 만들어 무엇을 얻으려고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오히려 이번 일은 내년 양대 선거를 앞두고 한나라당이 너무 성급하게 검찰과 같은 권력기관을 견제하려 한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따라서 한나라당은 愼총장 해임요구로 정부와 민주당을 계속 압박하면서 원내에서 예산안과 민생법안에 치중해 국민에게 보다 다가서는 책임 있는 정당임을 보여주는 게 더 나았을 것이다.

더 이해할 수 없는 것은 탄핵안이 무산되는 과정에서 민주당과 자민련이 보여준 룰을 무시하는 태도다. 표결에 참여하지 않고 퇴장한 자민련이나 의석에 앉아 있으면서도 투표하지 않은 민주당의 행위는 어떤 이유로도 용납되기 어렵다.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의 총재직 사퇴 이후 민주당은 우리 정치사에서 보기 드문 실험을 하고 있다. 당권.대권 분리라든지 예비경선제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민주당의 움직임은 모두 DJ 이후 당이 홀로서기에 성공하느냐를 둘러싼 노력이라고 볼 수 있다.

민주당의 홀로서기는 몇가지 새로운 제도를 도입한다고 하여 성취되는 것은 아니다. 당의 구성원,특히 소속의원 각자가 당론에 짓눌리지 않고 개별 입법기관으로서의 모습을 명실상부하게 보여줄 때 그것은 가능해진다.

그러나 이번 사태에서 민주당 의원들은 당론을 추종하는 구태의연한 모습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했다. 이러고도 어떻게 민주당이 체질개선을 통해 홀로 설 수 있다는 것인지 걱정이 앞선다.

더구나 민주당은 이번에 감표거부를 통한 표결저지라는 새로운 선례를 한국정치사에 남기게 됐다. 이제까지 퇴장, 농성, 의사진행방해 등 갖가지 방법이 국회 내에서의 표결저지에 동원됐지만 감표거부는 없었다. 그런데 민주당이 이런 기상천외한 방법을 찾아냄으로써 앞으로 어느 정당이든 보다 손쉽게 표결을 저지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됐다.

자민련은 이번에도 소수파의 위력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그러나 이번 사태는 국민들에게 자민련이 말하는 선택적 공조의 본질이 무엇인지에 대해 더 큰 의문을 품게 만들었다. 한나라당과 민주당 사이를 무원칙하게 기회주의적으로 오가는 것이 과연 자민련의 정체성이 아닌지 국민들은 자못 궁금해하고 있다.

*** 실망스러운 선택적 공조

이렇게 각당이 별 소득 없이 사태를 벼랑끝까지 몰고 가 서로 대치하고 있을 때 가장 큰 피해를 보고 있는 것은 국민이다. 지금 국회에는 계류 중인 법안이 모두 6백10건이고, 이 중 이번 회기 안에 시급히 처리해야 할 민생법안이 1백20건 정도 있다.

내년도 예산안도 이미 12월 2일 법정처리시한을 넘긴 상태다. 각당은 지금이라도 소득 없는 냉각상태를 풀고 임시국회를 열어야 한다. 이 국회에서는 우선적으로 예산안과 민생법안을 처리해야 한다.

하지만 사태를 이렇게 만든 근본요인인 검찰총장의 정치적 중립성을 확보하기 위한 제도적 정비도 소홀히 해서는 안될 것이다.

인사청문회 대상에 검찰총장이나 국정원장을 넣는 것이 그 예가 될 것이다. 이번 사태에서 정치권이 교훈을 얻어야 한다면 그동안 그들이 이런 제도적 장치를 정비하는데 지나치게 소홀했으면서 성급하게 대결로만 치달으려 했다는 점이다.

金一榮(성균관대 교수, 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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