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 중국 경제 대장정] 26. 여기는 아직도 일본 조차지-다롄(1)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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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20세기초 러시아에서 일본으로 손바꿈을 탄 다롄은 지금도 경제적으로는 일본의 '조차지'다. 인근의 뤼순(旅順)항은 1904년 일본이 러시아 태평양함대를 기습해 대승을 거둔 곳이다.

그후 다롄은 일제의 대륙침략 교두보가 됐고 지금은 일본기업의 대륙진출 거점이 됐다. 모양만 달라졌을뿐 일본은 1세기에 걸쳐 다롄을 장중에 쥐고 있는 셈이다.

다롄시 한복판 중샨(中山)광장의 다롄빈관(大連賓館). 고풍스런 바로크식 건축으로 유명한 고급호텔이다. 1914년 일본의 남만주철도회사가 세운 야마토호텔을 내부 수리해 그대로 사용중이다.

비운의 '마지막 황제' 푸이(溥儀)도 다롄에 오면 이곳에서 머물렀다. 일본 여행사들의 다롄 패키지 상품에도 단골로 포함돼 연일 단체 관광객들이 몰려든다.

다롄빈관이 과거의 일본을 상징한다면 경제기술개발구는 현재의 일본을 상징하는 곳이다. 개발구에서 눈에 들어오는 간판은 온통 일본기업들이다.

다케다(武田), 코니카, 도시바(東芝), 산요(三洋), 캐논, TDK, 오므론, YKK 등이 모두 이웃이다. 다롄시 전체의 일본기업은 2천여개로 이곳 외국기업의 40%쯤 된다.

일본기업이 집중되다 보니 이미 오래전에 일본어가 다롄의 제1외국어가 됐다. 일본어를 해야 취직이 잘되므로 다롄의 외국어학원에선 일본어과가 가장 인기다. 심지어는 밤거리의 호객도 일본어로 한다.

1970년대말 개혁.개방을 외친 중국이 광둥(廣東).푸젠(福建)성을 외국에 열었을때 처음 몰려든 것은 어디서나 그랬듯 화교자본이었다. 반면 다롄만은 개방초부터 일본의 투자가 압도적이었다. 지금도 1백억달러에 달하는 다롄시 수출입의 50%이상이 일본과 관련된 것이다.

이곳의 일본기업들에게 "왜 다롄인가"라고 물으면 잠시 답변을 잃고 만다. 일제시절 다롄에서 기반을 닦았던 일본기업들이 많기 때문에 이제 와서 새로 진출이유를 대는 것이 오히려 부자연스러울 정도라는 것이다.

일본무역진흥회(JETRO) 야부우치 마사키(藪內正樹) 다롄 사무소장은 이를 조차지 시절의 인간관계로 거슬러 올라가 설명한다.

"일제시절 다롄에서 살던 일본인들에겐 당시 사귀어둔 중국인 친구들이 많습니다. 이들이 일본 기업의 든든한 인적 네트워크가 돼줬습니다. 이때문에 일본 기업인들은 타지역에 비해 다롄에 신뢰감과 친근감을 더 느끼게 됐습니다. 또 일제시절 다롄 시내에선 전투가 벌어지지 않아 일본에 대한 인상도 좋은 편입니다."

일제시절의 기반이 없는 기업도 다롄을 찾기는 마찬가지다. 전후 설립된 스타정밀이나 다스콤의 경우 다롄에 대한 향수가 전혀 없는 기업이다. 89년 중국 전역을 돌면서 입지를 물색한 끝에 결국 다롄이 '중국내에서 일본이 가장 잘 통용되는 곳'으로 결론지었다.

일본이 남겨둔 산업기반이나 물류환경, 일본에 대한 감정, 그리고 일본인을 위한 주거환경 면 등에서 최적지라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도시들이 맹렬한 기세로 산업화하고 있는 판에 다롄의 매력이 영원할 수는 없다. 이를 다롄시도 알고 일본기업도 안다. 그래서 이들은 한단계 더 나은 '다롄'을 만들기 위해 의기투합했다.

이렇게 해서 나온 것이 부품산업 육성 프로젝트다. 일본 대기업들이 다롄의 중소부품업체들을 하청기업으로 부릴 수 있도록 이들의 실력을 단시간내 일본수준으로 높이자는 것이다. 일본 부품업체를 유치해 이 지역 기초산업의 리더로 삼는다는 계획도 들어 있다.

이 프로젝트에 앞장선 곳이 캐논. 다롄시는 지난해 캐논에 기술수준이 높고 부품수가 많은 레이저 프린터 본체를 다롄에서 생산해달라고 요청했다. 캐논은 그동안 다롄의 부품산업이 약하다는 이유로 카트리지만 다롄에서 만들고 본체는 주하이(珠海)에서 생산해왔다.

그러나 다롄시의 끈질긴 요청을 받아들여 올해 다롄산 부품을 사용해 프린터를 소량 생산하기 시작했다.

캐논은 대량생산을 위해 다롄의 부품업체들을 이잡듯 뒤지고 있다고 한다. 국영기업 몇군데도 부품업체로 지정해 키울 계획이다.

이것이 먹혀들어 원가나 품질이 주하이 수준으로 높아지면 2003년말 1백만대 생산체제를 갖추는 것이 목표다.

이 프로젝트가 성공하면 다롄의 산업지도는 적잖게 바뀐다. 중화학공업과 일본 대기업 일변도에서 벗어나 중소 부품업체들이 뿌리를 내리게 된다. 이때 일본 조립업체들이 추가로 진출하는 선순환이 일어날 수도 있다. 다롄시가 노리는 것도 이점이다.

JETRO도 부품산업 육성에 아이디어를 냈다. 이름도 생소한 '역(逆)견본시'다. 보통 견본시는 생산자가 샘플을 전시하고 바이어들이 구입하지만 이 행사는 정반대다.

바이어인 일본 기업들이 "이런 수준의 부품을 만들 수 있는 생산자를 찾는다"며 샘플을 전시하고 중국 생산업체들이 자기 실력을 가늠해 상담하는 식이다. JETRO측은 "중국 기초산업의 실력 다지기를 돕는 행사"라고 말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일본기업들도 덕을 보자는 목적이다.

일본기업들은 다롄을 활용하는데 그치지 않고 가꾸는데도 열심이다. 그래야 앞으로 더 요긴하게 써먹을 수 있다는 장기적인 안목이 깔려 있는 것이다.

이정재(경제연구소) ·남윤호(도쿄특파원) ·양선희(산업부) ·정경민(경제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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