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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격동의 시절 검사 27년 (6)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7면

부천시 성고문 사건

6. 왜곡 · 축소된 결정

7월 22일 수사기록 원본은 대검으로,복사본은 법무부로 보내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퇴근 무렵 김수장(金壽長)특수부장이 검사장실로 찾아왔다.

대검에서 우리가 밝혀 낸 내용 가운데 마지막 부분만을 빼고 모든 사실을 인정하는 내용으로 불기소장 초안(草案)을 만들어 올리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했다.

모든 사실은 다 인정하고도 피의자에게 기소유예 처분을 하는 것으로 이 사건 처리를 끝내야 할 상황이 되고 있었다.

한숨이 나왔다. 모두가 어떻게 된 것 아닌가.대검에 근무하는 후배검사에게 "왜 이러한 지시가 내려왔는지, 진의가 무엇인지 확인해 달라"고 부탁했으나 연락이 없었다.

대검도 제 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엉터리로 발표 해 놓고 이제 와서 얄팍한 일말의 양심 때문인지, 상부가 갈팡질팡하고 검찰이 갈팡질팡하고 있다.

7월 24일 서울.경기지역에 갑자기 많은 비가 내렸다. 전날 저녁 후배검사들과 술을 많이 마셨기 때문인지 출근하기가 싫었다. 낮 12시에 일어나 오후 2시께 출근했다. 부하들이 걱정스러운 얼굴이다.

대검에서 "퇴근 전에 불기소장 초안을 빨리 보내라"고 독촉을 했다.

金부장은 "머리가 아파서 못하겠다"고 호소했다.나도 시킬 생각이 없었다. "기록을 모두 대검과 법무부가 가지고 있고 발표문도 그쪽에서 모두 손질 했는데 왜 우리가 불기소장 초안을 만들어야 하는가"하는 반발심이 생겼다.

7월 25일 대검에서 다시 불기소장 초안을 만들어 보내라는 독촉이 왔다는 보고를 받았다.

그래서 직원들이 불기소장 초안 두 개를 가지고 왔다. "왜 불기소장이 두개냐"고 묻자 "대검의 요구에 따른 것"이라는 설명했다.

1안은 7월 16일 金부장이 발표했던 수사결과와 같은 내용이고, 2안은 실제로 인천지검이 밝혀낸 내용들이 많이 포함된 것이었다.

결국 한 가지 사건에 두 가지 처분 결정문이 만들어진 참으로 해괴한 일이 벌어졌다. 실어증이나 뇌졸중에 걸리는 것이 속 편할 것 같았다.

8월 2일 아침 일찍 대검차장의 전화를 받았다.8월 1일자로 소급해 사건을 처리하라는 것이었다. 실낱같은 희망마저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거대한 조직 속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보잘것없는 나 자신을 생각하니 서글펐다. 장관과 총장이 대통령께 직언을 하든지,권력의 핵에 있는 사람들이 결단을 내린다면 다 풀릴 수 있을 터인데….

"만약 이 순간 내가 어떤 결단을 내린다면? 그 파급은?"(나는 당시 하루에도 몇 번씩 성명서를 발표하고 사직을 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12시가 조금 안됐을 때 대검차장으로부터 "결정을 보류하라"는 전화를 받았다. 거대한 정신병동에 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사실과 동떨어진 엉터리 발표는 해 놓고 그래도 일말의 양심은 있어서인지 최종 불기소 결정문을 놓고 이리저리 잔머리를 굴려본들 무슨 소용인가. 지나온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전쟁이라도 치렀는지 나도 모르게 탄식이 나왔다.

정국이 너무 어수선하더니 8월 7일 독립기념관 본관이 화재로 모두 타버리는 사건이 생겼다. 타버린 독립기념관이야 복구하면 되지만 영원한 불덩어리인 이 수사기록은 없어지지 않는 시한폭탄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후 뉴스에 당정 개편설이 보도됐다.개편이 무슨 소용이 있나. 민심을 호도하려는 것에 지나지 않을 텐데. 본말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8월 19일 權양 사건을 오늘 중 처리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드디어 바람직하지 않은 지시가 왔다.'文경장의 강제추행 부분은 무혐의, 가혹행위 부분은 기소유예'.

즉 성고문 부분은 혐의가 인정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리고 다만 文경장이 수사를 하면서 權양을 가혹하게 다룬 점만을 인정하되 사안이 가벼우니 기소유예하라는 요구다.

곧 이어 원정일(元正一)법무부 검찰1과장이 장관이 주는 격려금이라고 하면서 2백만원을 가지고 찾아왔다. 간부들에게 골고루 나눠주라고 했다. 부천서 성고문 사건은 이렇게 왜곡.축소된 채로 검찰의 손을 떠났다.

9월 2일 변호사 1백66명이 재정신청을 했다.사법사상 최대 규모였다.

정리=이상언 기자

김경희 <전 한국 형사정책 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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