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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일 벗는 수지 金 사건] '5공판 반공드라마'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1987년 1월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던 '여간첩 수지 金의 남편 강제 납북 미수사건'의 진상이 15년 만의 검찰 수사로 하나씩 드러나고 있다.

지금까지 드러난 진상은 남편 윤태식(尹泰植)씨가 벌인 단순 살인사건을 안기부가 국내 정치상황에 이용하기 위해 조직적으로 은폐.조작한 사건이라는 것이다.

당시 안기부는 이를 위해 외무부측과의 마찰도 무릅썼고, 지난해에는 경찰 수사를 중단시킨 것으로 드러나 국정원과 경찰 고위 관계자들이 무더기로 사법처리될 처지에 놓였다.

◇ 87년 尹씨 기자회견=안기부는 87년 1월 8일 "S통상 홍콩 본부장 尹씨가 싱가포르에서 북한 공작원에게 강제납치됐다가 극적으로 탈출했다"며 태국 방콕에서 기자회견을 주선했다.당시 28세였던 尹씨는 기자회견장에서 감격적인 목소리로 눈물까지 흘려가며 납치 및 탈출경위를 설명했다.

"86년 9월 2일 상사 주재원으로 홍콩에 들어간 직후 수지 金(본명 金玉分.당시 34세)을 만나 10월 16일 결혼했다.

이 때까지 아내가 조총련 조직과 연결된 북한 공작원이라는 사실을 몰랐다. 그러던 중 87년 1월 2일 밤 조총련계 공작원 두 명이 아파트로 찾아와 '사업 이야기를 한다'며 아내를 방으로 데리고 들어갔다.담배를 사러 나갔다 들어오니 세 사람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전날 집으로 왔던 남자 한명이 다음날 찾아와 아내를 찾고 싶으면 싱가포르로 오라고 했다.

4일 오전 싱가포르 공항에 도착했더니 한 여인이 주소가 적힌 메모지를 주며 그곳으로 가라고 했다. 도착해보니 그곳은 북한 대사관이었다. 북한 대사와 아내는 나에게 평양행을 강요했다. 그들은 우선 스위스로 가서 기자회견을 하라고 지시했다.

내용은 '서울에서 사업을 하며 문익환(文益煥)목사와 신민당 유성환(兪成煥)의원에게 정치자금을 주었는데 검찰이 두 사람을 구속하고 수사를 확대해 정치망명을 했다'는 것이었다. 이런 협박을 받고 호텔로 돌아온 뒤 감시소홀을 틈타 한국대사관으로 탈출했다."

尹씨는 다음 날 안기부 요원들과 함께 귀국해 김포공항에서 똑같은 내용의 기자회견을 했다.

◇ 수지 金 시체 발견=尹씨가 귀국한 지 17일째이던 1월 26일 수지 金이 홍콩의 아파트 안방 침대 밑에서 목이 졸린 채 숨져 있는 것이 발견됐다. 홍콩 경찰은 수지 金 여권을 검사한 결과 홍콩을 떠난 적이 없으며 타살이 명백하다고 결론짓고 수사에 착수했다.

그뒤 홍콩경찰은 尹씨를 살인범으로 지목하고 우리정부에 신병 인도를 요청했으나 정부는 이를 거절했다.

◇ 안기부의 은폐 및 배경=검찰의 최근 수사에서 안기부는 수지 金의 시체가 발견되기 전부터 尹씨가 살인범이라는 사실을 파악하고 있었던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검찰에 따르면 尹씨는 87년 귀국 직후 안기부 조사를 받으면서 "내가 아내를 살해했다"는 내용의 자술서까지 작성해 제출했다.

또 최근 검찰이 국정원으로부터 넘겨받은 당시 기록과 당시 외무부 관계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尹씨가 기자회견에서 주장했던 탈출경로도 사실과 다르다. 실제로 尹씨는 북한대사관을 탈출해 곧바로 한국대사관을 찾은 게 아니라 미국대사관측에도 망명을 요구하다 통보를 받은 한국대사관 관계자들에 의해 신병이 넘겨졌다.

당시 대사관측은 또 모종의 경로를 통해 尹씨가 북한대사관을 찾아가 자진월북 의사를 밝혔으나 거절당한 사실도 파악한 상태여서 당시 장세동(張世東)안기부장 명의로 온 尹씨 기자회견 협조요청을 거부했다. 이 때문에 안기부는 尹씨 기자회견을 싱가포르에서 하지 못하고 방콕에서 하게 됐다.

尹씨가 북측으로부터 강요받았다는 기자회견문에 등장한 兪의원은 86년 10월 '국시(國是)발언 파문'으로, 文목사는 86년 5.3 인천사태 배후인물로 각각 구속된 상태였다.

따라서 안기부는 당시 5공정권의 정치적 목적에 따라 이 사건의 진상을 알면서도 '북한 공작원에 의한 납북미수 사건'으로 몰고간 것으로 보인다.

특히 외무부측과 마찰을 빚으면서까지 이 사건을 왜곡 조작했다는 점에서 이 과정에 당시 안기부 고위층들이 연루됐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검찰이 장세동 당시 안기부장의 조사 필요성을 제기하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장정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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