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 포럼] 역사 평가의 거품 빼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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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역사적 평가와 현실적 이익 중에서 선택하라면 목숨을 내놓고라도 역사의 평가를 택할 것이다."(DJ, 노벨평화상 수상 1주년)

"김영삼 전 대통령(YS)이 나라 망쳤다고 매도당했다. DJ정권이 그런 비난을 사과하면 YS와의 화해가 가능하다"(박종웅 의원)

임기 말의 대통령들은 역사가 자기 치적을 정확히 기록할 것이라는 기대로 위안을 삼아야 하는가. 그리고 다음 정권에 의해 평가절하되는 것인가. 공정하다지만 때로는 변덕스러운 역사에 기대야 하는 임기 말은 늘 초라하다.

*** 초라한 임기말 대통령들

한국의 대통령들은 당대에 '성공한 대통령'이 되기 힘들다. 그것은 리더십의 부족탓만은 아니다. 5년단임제의 시간 제약, 명분.위선의 정치 비평풍토, 뒤틀린 역사의식 등 구조적 문제가 겹쳐 있다.

5년 임기 중 첫해는 국정 적응에 바쁘고 마지막 1년은 권력이동기다. 힘쓸 수 있는 기간이 짧은 만큼 국정 실험이 적정 수준을 넘으면 혼선을 부른다. 김대중 대통령의 교육개혁과 의약분업은 이념적 요소를 가미하는 위험스러운 실험으로 진행되면서 정권 기반이 헝클어졌다. 민생을 편하게 해주는 데 중점을 두기보다 기존 질서의 변혁에 신경을 쓰는 개혁과제는 짧은 임기와는 맞지 않는다.

국가 경영은 선택이다. 민주주의는 최선이 아니면 51%의 차선을 추구한다. 그 과정에는 리더십의 냉정한 결단과 치열한 고민이 있다.

그러나 우리 정치문화에선 이런 고뇌의 가치, 선택의 불가피성을 제대로 인정하지 않는다. 최선과 완벽주의의 명분으로 국가 운영의 성적표를 깎아내리고, 중국의 요순(堯舜)식 천하태평론의 잣대를 들이대 탄식한다.

싱가포르 리콴유(李光耀)전 총리의 국가운영은 일류국가 만들기의 모델이다. 기업 하기 좋고, 공무원 부패가 없는 나라로 부러움을 사고 있다. 배고픔과 극한정쟁에서 허덕이는 신생국 싱가포르를 살리기 위한 그의 선택은 정치.경제의 동시발전이 아닌 경제우선정책이었다. 박정희(朴正熙)식 국가 발전론의 아류이며 그것으로 기적을 이뤄냈다. 그가 한국 정치 속에 존재한다면 어떻게 됐을까. 그의 치적은 형편없이 상처가 났을 것이다. 싱가포르가 정치후진국이라는 비판론이 기세를 올렸을 것이다. 그의 국정 선택에 깔린 고뇌를 읽기에는 우리 정치문화에 담긴 역사의식의 그릇과 국가경영의 안목은 작다.

이런 분위기는 양김(兩金)정치의 부정적 산물이기도 하다. 그들은 자기 임기 중에만 극적인 국가발전이 있을 것이라고 자신했고 과거 리더십의 고민을 묵살했다. 선지자(先知者)적 정치를 하려 했던 YS는 심지어 "단군 이래 한국은 썩었다"고 말했다. "정치는 흙탕물 속에 피어나는 연꽃"이라고 했던 DJ는 자신만이 역사 속의 연꽃이 되고자 했다.

그런 풍토는 과거 부정과 자기 비하의 역사 의식을 부추겼다. 여기에 편견과 위선의 일부 문화비평이 가세하면서 우리 사회는 영웅은커녕 예수와 부처를 빼고는 누구도 존경받기 힘들게 돼버렸다. 국론분열의 병폐가 심각해진 것이다.

그로 인해 치명적인 것은 40대 후반부터의 어른들이 자식들에게 존경받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여론조사를 하면 동아시아 국가 중 어른 존경의 수치가 늘 꼴찌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수많은 신생 저개발국 중 유일하게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뤄내 큰소리 칠 수 있는 나라의 어른들임에도 주눅이 들어 있다.

*** 도덕과 명분 색깔 벗어야

DJ와 YS도 국정의 많은 업적이 있음에도 그들이 턱없이 올린 역사 평가의 잣대에 맞추지 못하면서 초라해지기 시작했다. 대통령 통치사에 도덕과 명분의 색깔을 잔뜩 입혀놓은 데 대한 자업자득인 셈이다.

그렇다면 양김 시대의 남은 역사적 의무는 무엇인가. 무엇보다 역사 평가의 거품을 빼주는 일이다. 역사 접근의 눈높이에 균형감각을 넣어줘야 한다. 대통령이 자기 임기 중 이뤄낼 수 있는 성취는 제한적이고, 어느 시대의 리더십에도 국가 경영의 고뇌가 있었다는 점을 인정해줘야 한다. 그것이 이 시대 어른들이 존경받을 수 있는 출발점이기도 하다.

박보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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