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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테이트 모던 미술관 초현실주의 특별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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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50면

어두운 방. 어디선가 심장 박동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온다. 무의식적으로 그 소리를 따라간다. 방 한구석엔 붉은 조명이 박동의 리듬에 맞춰 꺼졌다 켜졌다 반복하고 있다.

그 조명 아래 작은 그림이 한 점 걸려 있다. 작은 새 한 마리에 놀라 숲속으로 질주하고 있는 두 여자아이. 아이들의 심장은 뛰고 있다.

나는 지금 누군가의 꿈속에 들어와 있는 게 아닐까? 막스 에른스트의 '두 아이가 나이팅게일에 놀라다'(1924) 앞에서 나는 또다른 악몽을 꾼다.

지난해 봄 문을 연 런던 테이트 모던(Tate Modern)의 야심찬 특별기획전 '초현실주의:해방된 욕망(Surrealism:Desire Unbound)'. 회화.조각.드로잉 등 초현실주의 대표작을 총망라하고,연애편지.에스키스.작업노트 등 개인 문서들을 최초로 공개한 이 전시는 13개 소주제로 방을 꾸몄다. 각 방 입구에는 주제를 압축하는 시나 소설의 한 구절을 적어놓아 문학적 상상력을 한껏 불어넣는다.

13개 방은 저마다의 소리와 빛.색채로 기획의도에 부합하는 스토리라인을 만들어낸다. 13개 막으로 짜여진 한 편의 연극이다.

1920년대 유럽에서 전개된 초현실주의는 20세기 지성사를 수놓은 가장 강렬한 예술 운동.문학에서 시작되어 시각예술을 비롯, 심리학.철학.정치학을 아우르는 운동으로 발전했다. 초현실주의 운동의 지표는 사고의 자유와 상상력의 고양이었다.

이성을 타파하고 꿈.경이.무의식.광기.우연을 찬양했다. 특히 욕망은 사랑.시 그리고 자유를 노래하는 초현실주의 비전의 중심개념이었다.

욕망을 내밀한 자아의 진정한 목소리이자 인간의 본성을 이해하는 키워드로 보았던 것이다. 전시된 작품들은 미술로 승화된 욕망의 다양한 얼굴을 보여준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자기 발견의 물음에서 출발하여 그 물음을 끝없이 확장, 마침내 사랑의 이면에 숨겨져 있는 성 본능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마르셀 뒤샹의 걸작 '독신자들에 의해 발가벗겨진 신부, 조차도'(1915~23). 위에는 말벌 같은 신부가,아래엔 욕망의 모터인 독신자들이 묘사되어 있는데, 이들간에는 스파크가 일어나고 있다. 남녀 관계를 기계적 메커니즘으로 재현,에로티시즘의 지평을 넓혔다.

알베르토 자코메티의 '목이 잘린 여자'(1932)는 짝짓기를 끝낸 뒤에 상대를 게걸스럽게 먹어치운다는 사마귀에서 영감받은 조각이다. 성적 쾌락 한켠에 도사리고 있는 여성에 대한 공포가 느껴진다.

일상 사물의 낯선 조합을 통해 왜곡과 도착을 보여주는 살바도르 달리의 '바닷가재 전화기'(1936), 남성의 성기를 노골적으로 묘사했으나 제목은 정반대인 루이즈 부르주아의 '작은 소녀'(1968)도 초현실주의 작가들이 빚어낸 욕망의 또다른 얼굴들이다.

테이트 모던은 왜 하필 21세기 첫 해에 초현실주의의 욕망을 부활시켰을까? 이 전시는 단순히 미술사를 회고.정리하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다.

70여년 전 초현실주의자들이 주창했던 욕망의 담론은 마치 예언처럼 시대를 훌쩍 뛰어넘어 오늘의 우리에게 성큼 다가온다.

이성.통일성.합리성을 타파하고 다원적 주체.분열.욕망의 담론을 내놓고 있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이론 및 실천과 너무나 닮아있는 것이다. 욕망의 담론은 아직 살아있다.

9월 20일부터 시작된 이 전시는 내년 1월 1일까지 열리며, 이후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2002.2.6~5.12)으로 이어진다.

김경아 <art in culture 편집장>

*** 초현실주의 특별전은

최근 국제미술계에 영국미술의 약진이 두드러진다. 97년 로열 아카데미에서 열린 '센세이션전'이 그 계기.

영국의 젊은 작가 42인이 참여, 몸통이 절반으로 나뉘어 유리장 안에 담겨진 돼지, 머리와 팔이 분해되어 나무에 걸린 인간의 몸 등 충격적인 작품을 보여주었다.

이후 이 전시는 독일 함부르크와 미국 브루클린에서 순회전을 가짐으로써 유럽과 미국을 넘나들며 '영 브리티시 아티스트(yBa)'라는 신조어를 유행시켰다.

초현실주의 특별전은 전시장 밖에서도 다채로운 학술행사와 재미있는 대중 이벤트로 이어진다. BBC 라디오에서는 작가.퍼포머.문화평론가들이 참여한 생방송 토론회가 열렸으며, 초현실주의와 정신분석학 학술 토론회도 열렸다.

미술관에서는 살바도르 달리, 만 레이, 알프레드 히치콕, 데이비드 린치의 영화가 상영되는가 하면, 서점에서는 초현실주의 문학 서적을 일별할 수 있다. 홈페이지(www.tate.org.uk)에는 초현실주의와 관련된 '러브 퀴즈'를 마련, 당첨자들을 행사에 초대한다.

아트숍에서는 초현실주의 작품에서 보았던 눈과 입술로 사탕을 만들어 공짜로 나누어준다. 관람료는 성인 8.5파운드, 소인 6.5파운드. 인터넷과 전화 예약 가능. 금요일 토요일은 밤 10시까지 연장 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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