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권력기관끼리 진흙탕 싸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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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국정원 일부 간부가 경찰을 기만하고 있다."(이무영 전 경찰청장) "이무영 청장이 현직 시절에 찾아가 진상을 설명,협조를 요청했다." (국정원 金모 전 대공수사국장)

지난해 2월 '수지 金 피살사건'을 다시 파헤치려는 경찰 수사가 중단된 사유를 둘러싼 전직 경찰총수와 국정원 간부의 거친 말다툼이다.

전직 경찰총수의 주장은 국정원 간부들이 경찰을 교묘히 끌어들여 자신의 잘못을 덮으려 한다는 것이다. 반면 국정원 간부의 발언은 재수사 중단이 국정원이 아닌 李전청장의 자체 판단과 지시에 따른 것처럼 시사하고 있다.

재수사 중단 사유는 이렇듯 불투명하다.그러나 경위가 어떻든 양쪽의 다툼에는 권력기관끼리 벌이는 덮어씌우기의 치졸한 음모가 깔려 있다는 인상을 준다.

무엇보다 金전국장이 고인이 된 엄익준 전 국정원 2차장에게 책임을 미루자는 제안을 했다는 李전청장의 주장은 충격적이다. 사실이라면 국가 최고 정보기관 내부의 기강이 엉망이고, 조작.은폐의 기도마저 풍긴다.

이미 '진승현 게이트' 때 국정원의 추악한 내분이 드러난 바 있다. 여기에 연루돼 국정원(경제과장)을 그만둔 정성홍씨는 "나와 김은성 전 차장을 제거하려는 내부 음모가 있었다"고 주장했다. 누명을 썼다면서 자기 조직에 침뱉기를 했던 丁씨지만 陳씨에게서 1억4천만원을 받은 혐의로 구속됐다.'이용호 게이트' 때는 검찰 내부에서 책임 전가의 갈등이 드러났다.

이런 여러 장면은 현 정부의 공권력이 심각한 위기상황임을 전하는 사례다. 국정을 뒷받침하는 핵심 공권력에 몸담은 구성원으로서의 책임감.자부심.위계질서가 형편없이 흐트러져 있다.

검찰은 간첩으로 죽어간 수지 金의 억울함과, 그 가족들의 참담함이 얽힌 사건의 진상을 이른 시일 안에 파헤쳐야 한다. 그 출발은 재수사 중단을 놓고 누가 거짓말을 하는지를 단호하게 따져 보는 것이다. 그런 해원(解寃)은 공권력의 기본 책무다. 그러면서 음해와 책임 회피,폭로와 떠넘기기의 권력기관간 진흙탕 싸움을 명쾌히 정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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