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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60년] 대관령의 중공군 (95) 전투에 적응하는 국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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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된장과 김치만 있으면 들판에서 구한 나물로 반찬을 해서 먹고 싸우던 국군이었다. 지나치던 민가에 들르면 고추장 독을 열어 대충 식사를 때우면서 전쟁을 치렀던 국군이었다. 그러나 6·25전쟁이 치열해지면서 국군은 점차 현대전의 큰 스케일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사진은 전통적인 밥상을 펼쳐놓고 식사를 하는 어느 국군 부사관의 모습이다. 그 앞 땅바닥에는 도쿄의 유엔군총사령부가 일본 공장에서 만들어 국군에게 배급하기 시작했던 인스턴트 전투식량이 놓여 있다. [미 국립문서기록보관청]

사단 수준에서 벌이는 전투는 여러 가지 요소가 어울려 승패가 갈린다. 아무리 뛰어난 병력과 화력을 갖추고 있다 하더라도, 연계(連繫)된 옆의 부대가 먼저 무너지면 일거에 패배의 분위기에 휘말린다.

사단급 부대는 늘 전투 전면의 일부를 맡고 옆의 사단과 방어선을 이으면서 공격과 수비를 한다. 그 사단이 맡고 있는 전면을 충분히 책임질 수 있는 능력이 있다 하더라도, 옆의 사단이 적의 공격에 물러서면 그 사단은 치명적인 공격에 노출된다. 적은 특히 사단과 사단이 이어지는 전투 지경선(地境線)을 파고들기 십상이다. 한쪽을 허물면 다른 한쪽이 쉽게 와해된다는 점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전투가 잘 될 때는 이상하리만큼 수월하게 잘 진행될 때가 많다. 거꾸로 무언가가 풀리지 않는 매듭으로 인해 잠시 갸우뚱거리면 그 뒤로는 계속 전투가 잘 풀려가지 않는 경우가 많다.

전쟁 초기에 조직과 체계, 훈련 등에서 부족했던 국군은 그 점을 잘 이해하지 못한 측면이 있다. 전투 전면에서는 잘 버티다가 측방이 무너지면서 함께 적에게 무너지는 경우가 많았다. 공동으로 전선을 구축하면서 공격과 방어를 잘 이어가야 하는데, 자신의 전면만을 중시하다가 적에게 밀려 무너지면서 옆의 부대에 피해를 준 사례도 많았다.

경험과 아울러 아군끼리의 공동 작전 개념에 대한 이해가 적었기 때문에 생긴 일들이다. 어쨌든 적과 대치했을 때 아군의 전선 상황을 염두에 두고서 전체적인 그림을 이해하며 작전에 임하는 게 중요하다. 자기가 맡은 지역에 관해서는 죽음을 무릅쓰고서라도 지켜야 한다는 마음 자세가 무엇보다 필요했다.

나는 1군단장으로 부임해 군단 사령부를 옮긴 뒤 본격적인 작전 준비에 들어갔다. 그러나 상황은 내가 1사단장으로 있을 때와는 많이 달랐다. 군단장의 업무는 사단장에 비해서는 단순했다. 직접 전투를 지휘한다기보다는 일선 전투를 책임진 사단장들을 뒤에서 후원해주는 역할이 더 컸다. 사단이 필요로 하는 행정과 보급 분야는 육군본부와 사단이 직접 나서서 해결한다. 굳이 군단장의 재가를 거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군단장은 육본과 사단의 중간에 어중간하게 걸려 있었던 셈이다.

그래도 나는 아침 일찍 일어나면 전황보고를 먼저 챙겼다. 또 당일 싸움이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전선으로 지프를 타고 나갔다. 사단장과 그 예하의 연대장들과 의견을 교환하고, 지시사항을 전달하는 한편으로 그들의 애로사항을 듣기도 했다.

사단장을 대신해 육군본부와 연락을 취해야 하는 사항도 있었다. 미 군사고문단과 해군 및 공군의 화력 지원이 필요하면 내가 나서서 협조를 구했다. 게다가 최전선의 고지와 후방의 보급소를 오가면서 점검을 하다 보면 하루가 금세 지나가곤 했다.

부하들의 입장에서는 내가 조금 피곤한 스타일이었을 것이다. 강릉의 번듯한 법원 사무실에 있던 군단 사령부를 주문진의 해변 모래사장 위로 옮긴 것도 따지고 보면 내 스타일의 하나였다. 나는 전선을 중시했다. 전쟁이 터진 뒤 1년 동안 전선을 누비고 다녔던 내게 자연스레 쌓였던 습관이기도 했다.

전쟁 지휘관은 전선에 바짝 붙어 있을수록 좋다는 게 내 신념이었다. 물론 적의 공격권에 지휘부가 들어가서는 안 되겠지만, 가능하면 전선 지휘가 쉬운 지역에 바짝 붙어 현장과 함께 호흡해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 그래서 군단 사령부도 전선이 있는 쪽으로 바짝 붙인 것이다.

그리고 중공군의 공세가 부쩍 활기를 띨 무렵에 부임한 매슈 리지웨이 미 8군 사령관의 지시에도 귀를 기울일 부분이 많았다. 그는 각급 지휘관에게 2단계 아래 부대까지는 장악하고 있어야 전투를 잘 치를 수 있다고 강조했다. 군단장은 예하 사단과 연대까지, 사단장은 연대와 대대까지 장악하고 있어야 한다는 얘기였다. 나는 그런 점에 충실하려고 노력을 기울였다. 가능하면 많은 시간을 할애해 사단장 및 연대장들과 전투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주고받기 위해 신경을 쓰고 있었다.

강문봉(1923~88)

중공군의 춘계 공세 속에서 내가 방금 떠나왔던 국군 1사단의 분전 이야기가 들려왔다. 신임 강문봉 준장이 1사단을 이끌고 6일 동안 사투를 벌인 끝에 중공군을 저지하고 한때 수색~벽제까지 밀렸던 전선도 다시 북쪽으로 올렸다는 낭보(朗報)였다. 그로써 국군 1사단은 중공군 참전 이래 5차에 이어진 저들의 남진을 저지한 첫 국군 사단이라는 명예를 얻었다. 한국군 사단이 중공군에게 계속 패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으면서 신경을 곤두세웠던 신임 제임스 밴플리트 미 8군 사령관은 우리 1사단의 분투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나는 마음속으로 기쁘기 짝이 없었다. 지난 1년 동안 생사고락(生死苦樂)을 함께했던 전우들의 분투가 너무 자랑스럽기도 했다. 국군은 이로써 체면을 만회하고 있었다. 큰 전투에서 항상 북한군과 중공군의 집중 표적으로 떠올랐고, 결국 그들에게 패배해 등을 보이는 군대쯤으로 각인됐던 국군의 인상은 1사단과 6사단의 분전과 승리로 많이 상쇄할 수 있었다.

다행이었다. 미군과 연합군에 심어준 나쁜 인상을 만회한 것만이 그렇다는 게 아니었다. 우리 국군이 점차 이 전쟁에 적응하면서 한국인 특유의 강인한 면모를 살려나가고 있는 점이 그랬다. 그러나 곧 다루겠지만, 국군이 전쟁에 필요한 시스템을 갖추고 그를 원활하게 운용할 만한 기능을 확보하기에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백선엽 장군
정리=유광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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