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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체적 부실 공적자금] 下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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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외환위기를 겪은 지 4년이 지났다. 국민의 돈으로 조성된 공적자금을 쓰고 관리하는 일에 '발등의 불을 끄느라 정신이 없었다'는 변명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우리보다 앞서 금융위기를 겪고, 대규모 공적자금을 썼던 선진 외국에선 책임 소재를 철저히 하고, 정치논리 등 외풍(外風)에 휘둘리지 않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공적자금 관리기관들이 내돈처럼 공적자금을 아끼도록 한 것이다.

◇ 장사꾼처럼 일한다="우리는 민간 보험회사처럼 일합니다. 자동차보험회사와 마찬가지로 철저하게 상업적인 관점(commercial base)에서 움직이지요."

지난달 미국 워싱턴 노스웨스트 17번가 미국 연방예금보험공사(FDIC)에서 만난 스탠 아이비 정리.파산담당 부국장보는 이렇게 말했다. FDIC는 우리나라 예금보험공사와 비슷한 역할을 한다.

아이비 부국장보는 "상업적인 관점에서 일처리를 한다는 것은 최소비용의 원칙을 지킨다는 뜻"이라며 "최소비용 원칙은 1991년 법에 명문화된 이후 구조조정 과정에서 예외없이 적용됐다"고 강조했다.

공적자금관리위원회는 올 들어 수협중앙회 신용사업 부문과 부실 생명보험사.서울보증보험에 공적자금 투입을 결의하면서 국민경제적 손실이 크다는 이유를 들었다. 이에 대해 예금보험공사는 "불가피했지만 바람직스러운 일은 아니다"고 인정한다.

물론 미국도 시장이 깨질 우려가 크다고 판단될 경우 최소비용 원칙의 예외를 허용하고는 있지만 엄격한 절차를 거친다. FDIC와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가 각각 3분의 2 이상의 특별 결의를 통해 재무부장관에게 건의하면 장관이 판단하고 대통령에게 보고한다. 대통령의 통제 아래 주무장관이 책임지도록 한 것이다.

FDIC가 최소비용의 원칙을 확고하게 지킬 수 있는 데는 정치적인 독립성이 작용한다. FDIC는 공무원 조직이지만 정치적으로 휘둘리지 않는다. 아이비 부국장보는 "FDIC 의장은 상원 추천으로 대통령이 임명하지만 한번 임명하면 대통령도 해고하지 못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FDIC가 오직 납세자의 돈을 한푼이라도 덜 써야 한다는 관점에서 일한다고 전했다.

지난달 말 방문한 캐나다 예금보험공사(CDIC)의 조셉 린지 부장은 "우리는 단순한 출납창구(pay box)가 아니다"고 말했다. 금융기관이 망하면 그냥 수동적으로 예금보험금을 지급하는 역할을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린지 부장은 "우리 공사도 87년까지는 출납 창구 역할에 머물렀지만 이제는 보험금을 써야 하기 전에 미리 금융기관의 부실을 파악, 대처하는 등 적극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정운찬 서울대(경제학)교수는 "공자위를 포함한 정부의 각종 위원회가 고위 공직자의 책임 회피용으로 전락하지 않도록 관심있게 지켜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 과학적 회수기법 활용을=정부는 이제까지 공적자금이 얼마나 회수될 것인지 공식적으로 밝힌 적이 없다. 정부는 그동안 "금융 구조조정이 끝난 후의 최종 회수율이 중요하다"는 입장을 고수하다가 최근에야 "내년 상반기에나 회수율을 확정할 수 있을 것"이라는 쪽으로 돌아섰다.

미국은 다른 방식을 택했다. 아예 공적자금을 조성할 때부터 '손실기금(loss fund)'과 '회수가능한 자금(working capital)'으로 나눠 별도로 운영한 것이다. 예금대지급.출연 등으로 투입된 공적자금은 일부를 제외하곤 회수가 어렵기 때문에 이 부분은 손실기금에 넣어 회수 대상에서 제외한 것이다.

회수 가능한 부분에 회수 노력을 더 집중하는 '선택과 집중'방식을 택한 셈이다. 아이비 부국장보는 "가장 일찍 손실을 인식하는 것이 손실을 최소화하는 길(earliest loss is your best loss)"이라고 말했다.

이상렬.서경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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