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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제주의 순결 지키려면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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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얼마 전 제주도의 다랑쉬오름에 가 보았다. 2년 전 세상에 알려진 4.3항쟁 때의 학살 현장이 있는 곳이다. 그 때 사라져버린 다랑쉬마을에는 말없이 서 있는 팽나무 몇 그루와 여기저기 보이는 돌담의 흔적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이 곳에도 시간은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 함정 숨은 관광휴양도시

최근 제주국제자유도시 계획안이 확정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마음이 착잡해진다. 그것이 이 아름다운 섬의 운명이라면 그 길을 잘 헤쳐나가 여전히 아름다움과 순결을 잃지 않은 채 원하는대로 세계적인 관광휴양지로, 자유도시로 발전할 수 있기를 기원한다.

그러나 그 희망의 길에는 많은 함정들이 숨어 있다는 것도 우리는 알고 있다.

제주도의 평원과 작고 큰 오름들, 그리고 멀고 가까이 바라보이는 바다는 평화와 휴식을 가져다 준다. 그 때문에 제주에 간다. 교통체증과 공기오염도 없고, 교통방송에 귀 기울이며 조급해 할 이유가 없는 곳. 이 한가로움과 느림의 느낌, 좋은 공기, 때묻지 않은 자연의 힘, 돌과 흙, 청정바다, 그 냄새와 정기를 찾아 제주를 간다. 어느 한 오름에 올라 야생의 들꽃들 속에서 멀리 바라볼 때 제주는 영원히 잊지 못하는 땅으로 가슴에 새겨진다.

나는 아직도 우리나라에서 제주도를 빼고는, 소위 관광휴양지로 개발된 곳이 마음에 든 적이 없다. 우선 저급하게 지은 상가와 음식점 건물들, 공해에 가까운 간판들과 메뉴판으로 화해 버린 유리창들, 국적불명의 가로등, 흉한 보도블록과 도로시설물들이 입구에서부터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지금 육지에서는 이렇게 관광지라고 하는 곳은 다 오염돼가고 있다. 그렇게 살리려 했던 강원도의 동강도, 국립공원이라고 지정된 속리산과 북한산도, 그 수려한 변산반도도 이제 물.땅.경치 모두 거의 구제하기 힘든 곳으로 변해가고 있다.

육지에서의 이러한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이 제주도에서만이라도 되풀이되지 않아야 할 것이다. 제주도의 진정한 관광자원을 살리지 않고서는 국내는 고사하고 세계적인 관광휴양지.자유무역도시들과 경쟁하기 힘들다는 것은 자명하다.

결국 제주국제자유도시계획의 성공은 개발과 보존의 적절한 균형유지에 달려있다. 10년간 거의 5조원의 예산을 투입하는 개발사업이란 결국 엄청난 규모의 건설과 건축공사를 의미하고, 이에 따른 균형적인 자연환경과 미관의 보존대책을 위해서는 도 전역에 걸쳐 건축조례를 포함한 도시계획법의 총체적인 재정비가 우선 과제가 된다.

풍치미관 훼손, 자연녹지 파괴, 생태계 교란, 수질 오염과 공해를 최대한 막으려는 확고한 의지와 대책 없이는 제주도를 지키기 힘들다고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 개발과 보존 균형 유지를

시.군의 중심지를 제외한 제주 전역의 고도제한과 나홀로 빌딩 억제, 도심 밖 송신주와 전신주의 철저한 지중화 사업이 이뤄져야 한다.제주도의 지형을 따른 곡선.굴곡도로의 유지, 이질적인 모양과 현란한 지붕색의 건축물을 규제하기 위한 건축미관 심의제도 강화, 그린벨트 정책 강화, 인공적인 생태공원을 빙자한 자연훼손 금지 등이 필요하다.

전통민가와 나무의 등록제도 실시, 계곡과 개천모습 보존, 바다오염의 주범인 양어장 처리 등을 포함한 엄격한 수질오염 방지대책, 자동차공해 예방대책, 교통량 조절대책 등을 확고히 세우고 출발하지 않으면 불안한 상황이다.

국제자유도시화라는 거센 개발의 바람이 탐라에, 아직도 순결을 잃지 않은 처녀 같은 이 섬나라에 불어닥치고 있다. 이 바람은 폭력적이고 파괴적일 수 있다.

이 바람 앞에서 제주도민이 더욱 침착하게 오늘의 제주만이 아니라 내일의 제주까지도 생각할 수 있는 지혜와 용기를 갖게 되기를 바란다.

金紅男 <이화여대 교수 미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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