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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 혈세 횡령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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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탐관오리로 조병갑(趙秉甲)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다.

고종 때 고부군수로 부임한 뒤 흉년을 핑계로 만석보(萬石湺)를 쌓아 물세(水稅)를 받는가 하면 자신의 아버지를 찬양하는 송덕비를 세운다고 돈을 거두었다. 그가 혈세까지 착복한 게 동학농민운동을 일으킨 단초가 됐다.

『춘향전』의 남원 부사 변학도(卞學道)나 연산군 때의 남경(南憬)도 부당한 방법으로 재물을 모으거나 공공자산을 뒤로 빼돌린 인물로 악명이 높았다.

싱가포르를 오늘날의 청렴정부로 이끌어 오는 데 크게 공헌한 리콴유(李光耀) 전 총리가 그의 회고록에서 강조한 대목이 있다.

아시아 후진국 여러 나라를 둘러보면 내로라 하는 지도자들이 국민을 억압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 투쟁해 왔지만 일정 기간이 지나면 약탈자가 돼 국민으로부터 부(富)를 착취했다. 그래서 결국은 아시아 사회가 후퇴하고마는 현실에 분노했다는 것이다.

'청렴하고 효율적인 정부'를 만들기 위해 그가 발족한 조직이 오염행위조사국이었다. 정권 출발 초기에는 각 부서에서 1달러 수입도 반드시 상부에 보고하고 그 돈이 국민의 이익을 위해 어떻게 쓰였는지를 소상히 밝힐 것을 약속했다.

리콴유의 지시에 따라 오염행위조사국은 자유재량의 여지가 있는 권한에 대해서는 철저한 감독체계를 만들어 '청결 정부'의 이미지를 구축해 왔다.

산업발전 단계를 뛰어 넘을 때마다 각국은 공통적으로 경제의 거품 현상에 말리고 있다. 이른바 구조조정이 이뤄지면서 금융기관의 부실이 국민 생활을 짓누르고 이에 따른 국민의 원성이 한 정권의 뿌리를 흔들기도 했다.

일본의 경우 5년 전 이러한 상황에서 고집쟁이 변호사를 공적자금 회수기관의 최고 책임자로 임명해 사건을 수습하는 데 성공했다.

그 인물이 나카보 고헤이(中坊公平)였다. 당시 일본 정부는 부동산과 증권시장의 거품이 꺼지면서 전국 52개 금융기관이 도산하자 서둘러 6천8백50억엔(약 7조원)에 이르는 공적자금을 투입했다. 일부 금융기관 책임자들이 재산을 빼돌리거나 이미 투입된 공적자금의 행방이 묘연한 일도 있었다.

나카보는 가장 악질적인 방해공작을 받으면서도 숨겨진 재산을 찾는 현장지휘를 계속했다.그는 늘 생명의 위협을 받아 특수요원들의 밀착 경호까지 받아야 했다.

그가 강조한 것은 국민의 혈세가 헛되게 쓰여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우리나라의 공적자금도 이리저리 빠져나가고 있어 야단이다. 예금보험공사 측은 총만 있고 실탄이 없어 좀더 엄격한 관리가 힘들다고만 한다. 누군가 목숨을 건 감독 책임자가 없는가.

최철주 논설위원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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