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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너무 아름다운 병' 일그러진 386세대 담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51면

함성호(38.사진)씨의 시집 『너무 아름다운 병』은 386세대의 자화상을 그려내고 있다. 내가 잘 못 그린 것도,누가 방해를 한 것도 아닌데 그 자화상은 일그러져 있다. 한숨소리가 시 속에 가득하다.

"누구는 81학번의 불운에 대해 흥분하기도 하고/냉정하게 김대중 정부를 옹호하기도 했지만/나는 끝내 아무에게도/빌려야 할 돈 이야기를 꺼내지 못하고/홀로 네 거리에 서 있다/시대가 우리를 버렸어 하고, 한 벗이 비분강개했지만/아무런 울림도 일으키지 못하고 딴 얘기만 했다는 생각이 났다/나와 같이/모두들 말 못할 사연을 안고 돌아갔을/광화문 네거리의 어둠-더 어려운 시절이 돌아오리니/잘 쉬어라, 켄터키 옛집."('일구구팔년 가을'중)

말이 통하지 않는 시대이기에 함씨의 시들은 사전(辭典)의 형식을 취하기도 하고 때로 그림도 곁들여 있다. 그렇게 해서라도 말을 걸어보려 한다. 그러나 문제는 타인과의 불화가 아니라 자신 스스로가 불화에 젖어 있다는 것이다. 그래도 어쩌랴. 아픈 마음은 다독여야 한다.삶을 영위하는 건 아픔을 일부러 껴안는 일 아닌가.

"아프니□/안녕 눈동자여, 은빛 그림자여,사연이여/병이 깊구나/얼마나 오랫동안 속으로 노래를 불러/네가 없는 허무를 메웠던지/그런/너의 병은 왜 이렇게 아름다운지/어떤 무늬인지 읽지 않았으니/아무 마음 일어날 줄 모르는데"('너무 아름다운 병'중)

그 뒤 시인은 자신을 먼저 다독여 새 출발점에 서려 한다. 그때 선 자리는 이전과 같지 않으니 시적 화자는 이 시대의 전략은 이기기보다 버티기에 있다고 말한다.

"세상이 안개로 뒤덮이는 시간이 있다/불쑥 내가 그 남자의 지느러미를 보는 시간이다/…//빛의 운명이여, 이제 부디/나를 그 어둠의 빛 속에 가두어라/어두운 내가/별의 강들을 흘러/노 저어 나아갈 수 있게"('세상이 안개에 뒤덮이는 시간이 있다'중)

함씨는 시집 『56억7천만년의 고독』『聖 타즈마할』 등을 통해 도회적 감수성을 정제된 이미지로 길어올리는 재능을 인정받은 바 있으며 현재 건축 평론가로도 활동 중이다.

우상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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