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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사회과학] '마법의 등'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6면

두 번에 걸친 세계대전의 충격으로 유럽인들이 전쟁의 공포에 떨고 있을 때 그는 죽음이라는 화두를 정면으로 끌어들여 '제7의 봉인'(1957년)을 열었다.

'영화 철학자'로 불리는 스웨덴 출신의 영화 감독 잉마르 베리만은 이렇게 신.구원.죽음 등 묵직한 형이상학적 주제를 영화 속으로 초대했다.

동시에 이 거장이 바라본 것은 허약하기 그지 없는 인간의 모습이었다. 프랑스 영화감독 프랑스와 트뤼포는 "그 만큼 인간의 얼굴에 가깝게 다가간 감독은 없다"고 단언했다.

『마법의 등』은 '페르소나' '외침과 속삭임' '화니와 알렉산더' 등의 영화로 유명한 베리만이 일흔을 바라보는 나이에 자신의 인생과 예술을 돌아본 회고록이다.

여기엔 베리만의 난해한 예술세계를 풀어낼 수 있는 열쇠가 숨어 있다. 그는 자신의 창조력의 기반을 유년 시절의 경험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의 닫혀진 과거를 엿보면 어둠 속에서 떨고 있는 한 소년을 만난다.

루터교 목사인 아버지의 엄격한 교육 속에서 억압당한 소년 베리만은 현실과 유리된 꿈과 환상의 세계에서 탈출구를 찾았다.

표출하지 못한 아버지에 대한 적개심은 고독.죄의식.수치감 등과 맞물려 후에 그가 인간의 실존적 문제를 다루는 예술적 원천이 됐다. 봇물 터지듯 쏟아지는 그의 어릴적 자화상은 뒤늦게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풀려는 노력으로도 보여진다.

그의 이런 유년 시절은 책 속에서 그의 성년.노년과 맞물려 수시로 등장한다. 베리만은 일반적인 자서전의 연대기적 형식을 외면하고 그의 영화에서 보여지던 꿈과 현실.과거와 현재가 어지럽게 뒤섞인 '플래시백' 기법을 사용해 책을 서술하고 있다. 때문에 문학적인 맛보다 그의 영화적인 향취를 더 풍부하게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이 책에선 정작 그의 영화에 관한 얘기들은 좀처럼 찾기 힘들다. 대신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연극 이야기가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무대에서 허드렛일을 돕던 무명 시절부터 왕립 극장의 대표가 되기까지 그가 겪은 실패.성공담이 아주 구체적으로 소개되고 있다. 그의 연극에 대한 열정을 유감 없이 보여주는 대목이지만 그의 영화 팬들에게는 다소 실망스러운 부분이다.

영화 팬들은 채플린. 그레타 가르보.잉그리드 버그먼 등의 은막 스타들과 타르코프스키와 같은 동료 감독에 대한 일화가 맛깔스럽게 첨가돼 있으니 이에 만족하자.

이상복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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