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60년] 대관령의 중공군 (94) 한국군의 투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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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중공군은 공세를 펼쳤으나 연합군의 거센 반격에 밀려 많은 대가를 치러야 했다. 당시 포로로 붙잡힌 중공군들이 후송을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다. [미 육군부 자료]

돌이켜 보면, 국군이 중공군에 의해 집중 표적이 됐다고 해서 그저 약한 군대였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국군은 강했다. 준비 없이 맞이한 북한의 남침이었지만, 국군은 모든 전선에서 제 몸을 아끼지 않고 적에 맞섰다. 낙동강 전선에서 벌어진 여러 고지전에서 보여준 국군의 기개(氣槪)는 대단했다. 북진 대열에서도 국군은 적 앞에 움츠러드는 법이 없었다. 개개인의 면면에선 연합군의 다른 어떤 군대에도 뒤지지 않았다.

사격술이나 포격술, 무기를 다루는 여러 가지 재능은 오히려 연합군의 어떤 군대 군인보다 나으면 나았지 뒤떨어지는 사람들이 아니다. 미군은 한국군에게 포격술을 교육할 때 늘 놀라곤 했다. 재빠르면서 정확하게 탄착 지점을 계산해 내는 능력, 좌표에 따라 적진에 오차 없이 포탄을 쏴대는 기술 등에서는 오히려 미군보다 뛰어난 면모를 지녔기 때문이었다.

싸움의 기개에서도 국군은 결코 뒤처지지 않았다. 더구나 동족상잔의 피바람을 몰고 온 북한군을 상대하는 전장에서 국군은 절대 허약한 존재가 아니었다. 용감했고, 때로는 복수심에 불탔으며, 나 자신을 돌보지 않고 공격하는 용맹을 과시했다.

그러나 그런 우수한 자질을 한데 묶어가는 방법에서는 문제가 많았다. 조직력이 떨어지는 것이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역량을 다발로 묶어내는 능력, 효율적인 조직이 그 뒤를 받쳐주지 못했던 것이다.

앞에서 꺼낸 국군 6사단 얘기다. 그들은 그날 중공군의 공세에 하룻밤에 무너진 사단이다. 미 9군단장 윌리엄 호그 중장으로부터 “어떻게 이들을 사단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라는 치욕적인 호통을 들었던 사단이다.

장도영 (1923~ )

그러나 역전의 국군 6사단이었다. 그들은 그냥 물러서지 않았다. 힘차게 재기했다. 그 얼마 뒤 벌어진 용문산과 화천 근처 파로호의 대승은 6사단 차지였다. 용문산에서 적을 맞아 파로호로 몰고 간 6사단은 그곳에서 대첩(大捷)을 거뒀다. 장도영 사단장은 절치부심했고, 급기야 부대원 전체가 삭발하는 투혼(鬪魂)을 보였다. 참패에 뒤이은 각성과 피나는 훈련, 자신에 대한 깊은 성찰, 그리고 그에 이은 분발(奮發) 때문이었다.

나는 이 점을 지적하고 싶다. 국군 6사단은 참패 뒤 처절한 노력을 기울여 재기하는 데 성공했다. 그것은 싸움에 대한 의지, 그리고 강한 단결력과 거듭된 훈련 덕분이다. 적에게 다시는 꺾이지 않겠다는 투지를 다지는 것과 고된 훈련을 견뎌내는 것은 강한 군대의 밑바탕이다.

6사단은 사창리에서 밀린 뒤 5월의 중공군 공세를 맞아 전혀 다른 부대로서 싸움에 임했다. 2개 연대를 용문산 후방에 포진해 주 저항선을 형성하고, 1개 연대를 앞에 내보내 적을 유인하는 데 성공했다. 앞에 선 연대의 방어선을 주 저항선으로 오인한 중공군이 총력으로 덤비게 한 뒤 2개 연대를 우회시켜 이들을 포위했다. 그 다음은 6사단의 대승이었다. 포위된 중공군이 후방으로 밀리면서 화천 저수지까지 패주했다.

6사단은 이들을 조직적으로 침착하게 몰았다. 5월 28일 하루에만 3만8000여 명의 중공군 포로를 잡아들이는 대단한 승리를 거뒀다. 그 전투에서 중공군 6만2000여 명이 사살되거나 포로로 잡혀 저수지 일대는 피로 물들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이를 기념해 화천 저수지에 ‘오랑캐를 무찌른 곳’이라는 뜻의 ‘파로호(破虜湖)’라는 이름을 붙여줬다.

무기를 들고 싸우는 싸움의 요체는 병력과 화력, 그리고 정신력이다. 물질적인 기반과 정신적인 토대가 받쳐줘야 싸움을 제대로 치를 수 있다. 그리고 덧붙이자면, 그것을 효율적으로 통제하고, 때로는 그 능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할 수 있게 하는 조직력이 받쳐줘야 한다.

장도영 사단장이 이끄는 6사단이 51년 4월 사창리 서북쪽에서 허무한 패배를 맛본 뒤 철저하게 보강했던 점은 바로 그런 것들이었다. 병력과 화력을 보충하고, 정신력으로 부대원을 재무장했다. 게다가 전술적인 측면에서 용문산 전면에 1개 연대를 내보내 거점을 만든 뒤 적군을 그곳으로 유인하는 기만전술을 편 게 주효했다. 아울러 적이 기만에 빠져들자 후방의 2개 연대를 재빨리 우회해 포위하는 전법을 구사한 것이다.

50년 동족상잔의 전쟁에 휘말린 대한민국 군인들은 대개가 투지가 넘치는 사람들이었다. 공산군의 남침에 적수공권(赤手空拳)으로라도 맞설 준비가 돼 있던 열정의 부대원이 대부분이었다. 이름 없이 전선에 뛰어들어 초개같이 목숨을 버린 학도병들도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각 전선에서 국토를 지킨다는 일념 아래 적군을 맞아 싸우다가 이름 없는 들풀이 된 이들도 부지기수다.

그 열정이 지금의 대한민국을 지켜낸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더 조직적으로 뭉치고, 능숙하게 훈련될 필요가 있었다. 훌륭한 부대원들을 튼튼한 밧줄로 묶어내 적에게 더 강하게 다가서서 공격을 가할 수 있는 체계가 필요했다. 그리고 화력을 능수능란하게 다룰 수 있도록 끊임없는 훈련이 필요했던 것이다.

나는 영국군 글로스터 연대의 분전, 국군 6사단의 허망한 패배 뒤 기적 같은 역전의 드라마를 지켜보면서 그런 생각에 빠져들었다. 국군에 대한 체계적인 훈련과 교육의 필요성을 그때 나는 절감했다. 우리에게는 더 많은 준비와 그를 위한 피와 땀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해 봄에 맞고 있던 중공군의 공세 속에서 다져진 내 생각의 일부였다.

백선엽 장군
정리=유광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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