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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페론과 탁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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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9면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일에 돈을 따지는 건 말도 안 돼요. 얼마나 썼는지 헤아려 보느라 멈출 순 없습니다!” ‘빈자(貧者)들의 성녀’로 추앙 받던 아르헨티나의 전설적 퍼스트레이디 에바 페론이 남긴 말이다. 그녀의 이름을 딴 재단을 통해 빈곤층을 위한 학교와 병원·양로원이 수도 없이 세워졌다. 천문학적 예산은 쓰는 족족 정부 보조금으로 채워졌다.

남편인 후안 페론 대통령도 통 크게 베풀었다. 노동자들은 1년 일하고 13개월치 봉급을 받아갔다. 기나긴 유급 휴가 등 공공서비스 수준이 ‘복지 천국’ 북구(北歐)를 따라잡았다. 그 결과 집권 5년 만에 나라 살림은 거덜나버렸다. 15억 달러에 달했던 국고 예비비는 바닥났고 국제수지도 엉망이 됐다. 뒤이은 정권들이 씀씀이를 줄여보려 했지만 한 번 선심 정책을 맛본 국민은 결코 용납하지 않았다. 남미 최초의 경제대국이던 아르헨티나는 다시는 그 영광을 되찾지 못했다.

‘태국의 후안 페론’으로 불리는 이가 바로 탁신 친나왓 전 총리다. 기업인에서 정치인으로 변신한 그 역시 거대한 표밭인 농민과 도시 빈민에 주목했다. 그들의 마음을 사고자 친서민 정책을 한 보따리 풀어 헤쳤다. 병원 문턱도 못 밟아본 이들을 위해 30바트(약 870원)만 내면 무슨 치료든 받을 수 있게 한 의료개혁 조치가 대표적이다. 임기 중 농민 채무를 동결하는 한편 국영은행들은 싼 이자로 신규 대출을 해줬다. 이 덕분에 농촌 소득이 50% 가까이 반짝 급등했고 빈곤층 비율은 절반으로 뚝 떨어졌다.

이처럼 좋았던 옛날을 못 잊는 태국 서민들이 거리로 몰려나와 두 달째 격렬한 시위를 펼치고 있다. 현 정부를 몰아내고 탁신을 권좌에 되돌리자는 거다. 하지만 상속·증여세조차 걷지 않는 태국의 취약한 재정 구조론 그때 그 시절 정책을 지속하기 힘든 게 현실이다. 그네들이 목숨 걸고 떠받드는 탁신조차 나라에 세금 한 푼 안 내고 19억 달러나 되는 주식 매매 차익을 꿀꺽 삼켰다.

페론이 그랬듯 탁신도 빈곤층 위한답시고 무책임한 정치로 망국(亡國)의 위기를 조장했을 뿐이다. ‘미소의 나라’ 태국이 미소를 잃게 만들었다. 줄줄이 손님이 떠나고 돈줄도 끊길 판이다. 요즘 여야를 불문하고 감당 못할 공약을 쏟아놓는 우리 선거판의 후보들도 자문(自問)해볼 일이다. 이러다 ‘한국의 페론’ ‘한국의 탁신’ 소리를 듣게 되는 건 아닌지.

신예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