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크 승부 조작 사실로 … 조폭까지 낀 일당 적발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18면

지난 1월 19일 케이블TV 게임전문 채널을 통해 생중계된 ‘스타크래프트’ 프로리그 S구단 대 K구단의 두 번째 경기. 프로게이머 진모(22)씨는 경기 시작과 함께 맵(가상 전투공간)의 한 중간에 공격 진지를 짓기 시작했다. 프로 게임에서 흔히 나오는 장면은 아니었다. 공격적이지만 상대의 역습을 받아 쉽게 패할 수 있는 모험적인 전술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대 게이머 박모(23)씨는 병사 조종을 어설프게 하는 등 방어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초반에 기선을 제압한 진씨는 바로 박씨 진영을 공격해 손쉽게 승리를 거뒀다. 게임 해설자는 “오늘 게임이 좀 이상하다. 기회가 있었는데 왜 공격하지 않지요”라며 박씨의 플레이가 평소 같지 않다는 점을 지적했다. 경기가 끝난 뒤 인터넷상에도 “게이머가 고의로 진 것 같다”는 조작설이 돌았다.

진씨가 과감한 전술을 구사할 수 있었던 것은 전날 상대 게이머 박씨의 전술을 미리 입수했기 때문이었다. 박씨는 진씨에게 “초반에는 공격하지 않겠다”는 작전 계획을 흘렸던 것이다. 박씨는 그 대가로 게이머 양성학원을 운영하는 박모(25)씨로부터 500만원을 받았다.

청소년들 사이에 큰 인기를 모으고 있는 스타크래프트 프로리그 경기가 불법 도박과 승부조작으로 얼룩졌다. 서울중앙지검 첨단수사2부는 16일 “스타크래프트 승부조작을 벌인 일당 16명을 적발했다”고 밝혔다. 검찰에 따르면 게이머 양성학원 운영자 박씨는 조직폭력배 김모씨(지명수배)와 유명 프로게이머 원모(23)씨와 공모해 게이머들에게 접근했다. 박씨 등은 선수들에게 “특정 경기에 져달라”는 부탁과 함께 게임당 200만~700만원을 송금했다. 이들은 인터넷에서 불법 운영되는 스타크래프트 경기 베팅 사이트에서 승률이 낮은 쪽에 돈을 걸고 실력이 더 뛰어난 상대 게이머를 매수해 지게 만드는 방식으로 승부를 조작했다. 이런 수법으로 12회에 걸쳐 9200만원을 베팅해 총 1억4000여만원의 배당금을 챙긴 것으로 드러났다.

박씨는 돈을 받고 게임을 져준 선수들에게 “협조하지 않으면 네 팀 감독에게 승부조작 사실을 알리겠다”고 협박해 150만~250만원씩 800여만원을 계좌로 송금받기도 했다.

검찰 조사 결과 스타 프로게이머 마모(23)씨도 승부조작에 연루된 혐의로 불구속 기소됐다. 1월19일 경기에서 진씨에게 박씨의 전술을 흘린 사람도 마씨였다. 그는 불법 도박을 하는 K3리그 프로축구선수 정모(28)씨의 청탁을 받고 “게임에서 져주면 돈을 받을 수 있다”며 동료들을 매수해 승부조작에 가담했다. 그는 이 과정에서 승부조작에 관여한 게이머들에게 전달돼야 할 돈 200만원을 챙긴 혐의다.

검찰은 적발한 16명 가운데 전·현직 프로게이머 11명 등 14명을 사기·상습도박 등 혐의로 기소(구속 1명·불구속 7명·약식기소 6명)하고 1명을 군검찰에 이송했다.

홍혜진 기자



선수 450여 명 … 대부분 연봉 1000만~2000만원
유혹에 약한 프로게이머 현실

‘일렉트로닉(electronic)스포츠’, 줄여서 흔히 ‘e스포츠’라는 분야는 근래 젊은 층을 열광케 하는 사이버 스포츠다. 국내 게임리그는 미국 블리자드엔터테인먼트가 개발한 ‘스타크래프트’ 같은 전략게임과 축구·야구 같은 스포츠게임을 포함해 24개 세부종목을 개인이나 단체가 겨룬다. 프로게이머는 약 450명이며 시장규모는 1200억원(삼성경제연구소 추산)이다. KT가 1999년 프로구단을 처음 만들어 현재 12개 팀이 있다. 아시아올림픽평의회(OCA)는 실내 아시아경기대회에서 e스포츠를 육상·사이클·하키·무에타이 등과 함께 정식 종목으로 인정했다. 한국e스포츠협회는 지난해 10월 대한체육회의 ‘인정단체’가 됐다. 9명으로 구성된 e스포츠 국가대표 선수단도 있다.

e스포츠계에서는 열악한 프로게이머 환경과 윤리의식 부재를 이번 사건의 원인으로 꼽는다. 초특급 선수는 1억원대, 유명 선수는 6000만~8000만원 정도를 받지만 2군으로 분류되는 이들은 연봉이 1000만~2000만원 수준이다. 검찰 조사 결과 연봉이 낮은 선수 중에 유혹에 넘어간 경우가 많았다. 특히 프로게이머가 17세 무렵 일을 시작해 21~22세 정도에 전성기를 누리다 내리막길을 걷는 경우가 많아 직종 전환도 힘들다.

소양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선수도 많았다. 검찰 관계자는 “중학 과정도 마치지 않고 연습생 생활을 시작하는 바람에 고교 과정까지 제대로 이수한 선수가 거의 없었다”고 전했다. 다른 사회생활 경험이나 인성을 쌓을 기회가 부족했다는 것이다. 김철학 한국e스포츠협회 사업기획국장은 “유명선수가 포함된 것은 이런 인성교육 부재 탓이기도 하다. 1년에 두 번뿐인 윤리교육 과정을 강화하고 이를 이수해야 프로 자격증을 주도록 제도를 개선하겠다”고 말했다.

문병주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