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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리틀EU 벨기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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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9면

2006년 12월 벨기에 국영방송 RTBF. 정규 방송 도중 갑자기 화면이 끊어졌다. 긴급뉴스가 흘러나왔다. “북부 플랑드르 지역이 독립을 선언했고, 국왕 부부가 해외로 도피했습니다. 벨기에란 나라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화면은 지방정부 깃발을 흔드는 군중과 분주한 공항 모습으로 꽉 채워졌다.

뉴스는 거짓이었다. 네덜란드어를 쓰는 북부와 프랑스어를 쓰는 남부의 지역갈등을 공론화하기 위해 방송사가 ‘BBB(Bye Bye Belgium)’란 암호명으로 2년간 준비한 가상방송이었다. 이런저런 비난이 방송사에 쏟아졌다. 그러나 벨기에 사람 열에 아홉은 진짜 방송인 줄 알았다. 남북 간 오랜 반목을 아는 터라 그런 일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고 믿은 것이다.

두 지역은 사사건건 충돌했다. 서로 지지 않으려 별의별 수단을 다 썼다. 심지어 남부 출신 실력자들은 프랑스어 인구의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아프리카 북부 프랑스 식민지에 사는 이슬람교도들이 벨기에로 이주하는 것을 장려했다. 벨기에가 최근 이슬람교도 의상(부르카)을 금지한 이면에선 이런 이주정책의 정치적 의도와 공과를 곱씹는 과정이 없지 않았다.

시끌벅적 싸우긴 해도 벨기에는 유럽연합(EU)의 모델이었다. 다문화·다민족이 그럭저럭 어울려 번영을 구가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줬기 때문이다. 그런 벨기에의 수도 브뤼셀은 EU의 수도 구실을 했다. EU 총본부와 유럽의회도 바로 거기에 자리 잡았다.

그런데 요즘 그 모델 자체가 흔들리고 있다. 선거구 다툼이 불붙인 분리주의 횃불을 북부지역이 다시 치켜든 것이다. 반목의 골은 그 어느 때보다 깊다. 7월부터 EU 이사회 순번의장국을 맡을 벨기에 총리가 다음 달 총선에서 선출될지 불확실할 정도다.

유럽통합은 전쟁에 시달린 유럽이 영구평화를 얻자는 장정이었다. 왕가끼리 혼맥을 쌓고, 동맹과 화친을 추구한 왕조시대 결혼정책의 현대판이었다. 문제는 경제위기로 먹고살기 힘들어진 요즘, 은근히 이혼을 꿈꾸는 나라가 늘고 있는 거다. 재정위기를 겪는 그리스나, 그 나라를 돕는 다른 EU 회원국이나 돌아서선 이혼 생각이 굴뚝같아 보인다. 유럽통화동맹의 불완전성을 샅샅이 알게 된 것이다. 벨기에 역시 복병이다. 유럽 곳곳에 잠복한 분리주의를 단숨에 깨울지 모를 일이다. 분단된 우리가 통일도 해보기 전에 세계는 다시 분열의 시대로 가고 있는 것은 아닐는지.

허귀식 경제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