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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 시평] 정치부터 비전 제시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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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의 여당 총재직 사임 이후 전개되고 있는 현실정치 담론은 '金心' 읽기 논쟁과 대선 후보 결정 향방 논쟁으로 집중돼 가고 있다.뭔가 순서가 뒤바뀐 것 같다.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은 여당을 현 위기 상황까지 몰고 온 실정(失政)의 구조적 원인을 규명하는 일이다. 그리고 국가(정부)와 사회(시민)영역간 상호관계의 현재적 모순(문제성)에 대한 바른 인식과 그 처방에 대한 논의인 것이다.

*** 국민통합 실패 혼란 가중

최근의 나라 사정을 보면 1차집단 연고에 근거한 '소집단주의'에 의해 정부 내에서는 물론 정치영역과 사회경제영역 모두에서 무질서와 혼돈이 계속되고 있다는 자기비판이 곳곳에서 일고 있다. 이러한 혼란상황은 결국 국민의 뜻에 기반하는 국가비전을 세워서 공유하지 못한 채 정치와 국정이 행해져 왔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정치지도자, 정부관료, 시민 3자 사이에 나라의 미래에 대한 모습과 국가-사회관계의 바람직한 작동양식에 대한 공유된 이미지가 있어야만 사회(국민)통합이 가능하고,질서가 바로 서며, 발전이 가능한 것인데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말이다. 국민 사이에서 국가비전을 제대로 공유할 때, 집단이기주의와 정략적 대립이 첨예하더라도 넘지 말아야 할 선만은 지키게 되는 것이다.

우리와 달리 영.미 등 선진국의 경우 민주주의 전통과 헌법에 명시된 건국이념을 일상생활 속에서 오랜 기간 실천해 왔기에 국가적 지향방향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가 높다.

그래도 이들은 기회 닿을 때마다 다시 단기적 국가비전을 세우는가 하면 이미 공유 중인 거시적인 국가비전을 재강조하는데,이 때의 국가비전은 단지 구호와 수사가 아니라, 국정의 우선순위를 매기고 정치권 내의 논쟁범위와 방향성을 규정한다.

성격은 다소 다르나 최근 중국도 '중국적 사회주의'를 내걸고 '21세기 최강국가 건설'이라는 국가비전 아래 혼연일체가 돼 있고, 일본은 '보통국가'론을 내세워 재도약하려 하고 있다. 한편 중남미 지역 국가들의 경우는 우리에게 반면교사 역할을 한다. 현란한 국가비전 구호는 있으나 정치지도자들의 권력욕과 인기영합적 민중주의(populism)의 동원 욕심 때문에 경제위기 극복과 사회갈등 치유에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다.

'국가비전' 문제에 관한 한 김대중 정부는 출범 초기의 자세에서부터 문제투성이다. '국민의 정부'라고 불러달라고 하면서도 '국민'과 '정부'간의 새로운 관계 양식의 실천적 당위성을 간과했다. 국가비전이 국민의 비전인지 지도자 개인의 것인지가 분명치가 않다.

그래서 제시된 비전 자체가 수사적인 '구호' 수준을 크게 넘지 못했다. 그 결과 정부와 일반시민간에는 물론 정부 내의 상.하급 부서간에, 심지어 당.정 간에서도 미래지향적인 목표에 기반하는 의사소통이 제대로 이뤄지질 못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모두가 대통령인 '金心'읽기에만 매달리고 종국에는 '제왕적 대통령'의 한국적 모델을 낳게 된 것이다.

현 정부에 '실정 책임'을 물으면 크게 분개한다. 그렇지만 정부.당, 그리고 사회로 하여금 스스로 당장 무엇을 어떻게 하면서 살아갈 것인가와 바람직한 국가의 미래상에 대한 확신을 갖지 못하게 한 책임은 피할 수가 없다.

거기에다 국민 마음 속의 '국정이미지'는 '정치검찰' '집단이기주의' '부정부패' '조직폭력'에 대한 통제능력 부재의 인상으로 얼룩져 있다. 결국 국가비전을 제시하지도 못한 셈이고, '국가비전급' 구호의 대국민 침투(penetration)에도 실패한 결과다.

*** 시민사회 저변 집약해야

나라의 장래를 위해서는 우선 시민적 수준에서라도 스스로 '국가비전 만들기'를 해야 할 듯하다. 국가의 미래를 국민의 손으로 국민의 뜻에 따라 세우고 실천하자는 것이다. 중앙일보의 국가비전 만들기 제안(9월 22일)은 중요한 모멘텀이다.

새로운 시대 상황에서의 차기 대선 경쟁은 누가 얼마 만큼 시민사회 저변의 염원을 국가비전으로 집약시켜 희망의 미래로 국민을 이끌어 갈 수 있는 지도자로 인정받느냐에 달려 있다고 본다.

요즘 시민들은 환상적 구호보다 법이 준수되고 질서있는 사회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나라의 이미지를 기대하는 것 같다. 국민이 세운 국가비전 실현을 위해 정치지도자들이 정직하고 헌신적일 때 비로소 우리나라의 장래에는 희망이 있다.

金東成(중앙대 교수, 국제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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