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week& cover story] 서울 양평동 구두 수선소 기남씨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03면

"세상 돌아가는 모습이 구두에 담겼다고 할까요. 하루 평균 들어오는 구두가 50켤레, 손님들이 풀어놓고 가는 이야기도 50가지인 셈이죠."

서울 양평동 한중상호저축은행 뒤편에 자리잡은 1평 남짓한 구두 수선대. 경력 27년의 '구두닦이 아줌마' 기남(53)씨에게 이 좁은 공간은 평생의 일터이자 세상의 목소리를 듣는 사랑방이다.

매일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기씨가 자리를 지키는 동안 좁은 구둣방은 쉴새없이 방문객을 맞는다. 장바구니를 든 아주머니가 "처녀 때 신던 건데"하며 낡은 부츠를 꺼내며 들어서자 차례를 기다리던 중절모 노인이 "경기 때문에 수선 손님이 많겠어"라고 말을 건넨다. 지나던 동네 주부들이 합세해 불경기 속 살림살이 이야기가 이어진다 싶더니 신문을 펼쳐 든 양복 차림의 단골 손님이 들어와 정치판 이야기를 꺼낸다. 구두 손님이 셋 중 둘이라면 나머지는 오다가다 한 마디씩 거들려는 인근 상인.주민들이다.

"일단 신발을 벗으면 긴장이 풀리잖아요. 닳은 구두에서 먼지가 털려나가고 광이 오르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마음도 후련해지고. 그래서 이런저런 세상사도 쉽게 나누게 되고."

27년 전 사업에 실패한 남편과 함께 빚을 내 간신히 구두 수선대를 차렸을 때만 해도 좁은 알루미늄 부스는 '감옥'같았다. 노점상.행상 등 온갖 직업을 전전하다 마지막으로 선택한 일이어서 부담도 컸고, 어두운 공간에 틀어박혀 있으려니 하루종일 가슴이 답답했다. "정말 아줌마가 구두를 닦아주는 거냐"며 신기해 하는 시선이 부담스러워 손님들과 말 한번 제대로 못 나눴다.

그러던 기씨는 남편의 건강이 악화돼 혼자 구둣방을 꾸려나가게 되면서부터 적극적이 됐다. "내가 가장"이라는 생각으로 악착같이 노력한 덕에 구두를 닦고 수선하는 기술이 부쩍 늘었다. 자신이 생기자 여유가 따라왔다. 구두 뿐 아니라 구두를 맡기러 오는 다양한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게 된 것. 수선대 한쪽 구석에 커피포트를 두고 기다리는 손님에게 차 한잔 건네며 두런두런 세상사는 이야기를 나누게 됐다. "여자가 무슨 구두닦이냐"던 손님들이 "아줌마 솜씨와 입담 때문에 여기만 오게 된다"고 말하기 시작했다. 이사를 간 뒤에도 찾아오는 단골이 하나둘 늘었고, 심심하면 구둣방으로 놀러나오는 손님들도 생겼다.

요즘의 화제는 역시 불경기. 구둣방만큼 경기를 빨리 체감할 수 있는 곳도 없단다. 한때 하루 200켤레까지 닦던 구두가 최근에는 50켤레 정도로 줄었다. 대신 낡은 구두를 수선해 신으려는 알뜰 손님이 30~40% 정도 늘었다.

기씨의 바람은 '꼬부랑 할머니'가 돼서도 이 구둣방을 그대로 지키는 것. 앉아만 있는 자세가 불편한 지 간혹 주먹으로 허리를 두드리는 그에게 "더 큰 공간으로 옮기면 좋지 않겠느냐"고 하자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다. 작은 공간이기에 더 많은 이야기와 사람들이 오갈 수 있고, 정도 붙는다는 것이다.

"이 좁은 곳에서 평생 친구로 지낼 단골 손님들도 만나고 아들.딸 대학 등록금도 벌었어요. 이 '구두닦이 아줌마'에겐 운동장처럼 널찍한 일터랍니다."

글=신은진 기자<nadie@joongang.co.kr>
사진=권혁재 전문기자 <shotgun@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