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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노재현의 시시각각

‘홍길동전’을 또 배우라고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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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교육부로부터 교과서 검정 업무를 위탁받은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이 지난주 2010학년도 교과서 검정 심사결과를 발표했다. 내년에 중학교 2학년생이 사용할 국어 교과서도 올해 심사 대상이었다. 모두 22종의 국어 교과서가 출품돼 7종이 탈락하고 15종은 심사에 합격했다. 중학교 국어 과목은 그동안 국정교과서 체제를 유지해오다 지금 1학년이 쓰는 교과서부터 검정 체제로 바뀌었다. 이에 따라 작년에 현 1학년생이 배우는 교과서 선정이 이루어졌고, 올해는 내년도에 2학년생이 배울 교과서를 심사한 것이다. 또 내년에는 3학년생이 쓸 국어 교과서 심사가 예정돼 있다.

문제는 이번에 탈락한 출판사들이 작년도의 1학년 국어 교과서 심사에는 합격했을 뿐 아니라, 일선 학교 현장에서 높은 채택률을 기록하고 있다는 점이다. 10만7000여 명의 중학교 1학년생이 배우고 있는 채택률 1위(14.8%) 교과서를 비롯, 채택률 3·5·6위 교과서들이 이번 2학년용 교과서 심사에서 줄줄이 불합격했다. 교과서는 학년별 연계성이 중요하므로 출판사들도 현재 사용되는 1학년 교과서를 편찬한 집필진이 2학년 교과서도 만들어 출품하게 된다. 그런 교과서들이 심사에 탈락했으므로 학생들은 1학년 때 배운 교과서가 아닌, 다른 집필진이 만든 다른 출판사의 교과서를 쓸 수밖에 없게 됐다. 심사에 불합격한 교과서들의 ‘1학년 버전’을 지금 배우고 있는 중학교 1학년생은 전체의 44.6%, 무려 32만3000여 명이다.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교과서 정책 때문에 이 많은 학생이 내년 2학년 때는 새로운 체제의 교과서로 국어 공부를 해야 하는 것이다. 교사들도 고역을 치를 것이 뻔하다.

탈락한 출판사들 입장에서는 교과서 제작비·심사료 등 경제적 손실이 뼈아플 것이다. 그러나 나는 출판사들의 상업적인 유·불리에는 관심이 없다. 몇몇 뜬소문이 있긴 하지만 심사 과정도 공정했을 것으로 믿고 있다. 주목해야 할 대상은 출판사가 아니라 교과서로 국어를 배울 우리 아이들이다. 전체 중학 1학년생의 절반에 가까운 학생들이 내년에 교과서를 바꾸게 됨으로써 어떤 일이 벌어질까. 우선, 심사에 탈락한 출판사들이 만든 1학년 교과서에 이미 나온 제재(텍스트)가 합격한 2학년용 교과서에 중복돼 실린 경우가 허다하다. 황순원의 단편 ‘소나기’, 이문열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허균의 ‘홍길동전’, 안국선의 ‘금수회의록’, 법정 스님의 ‘먹어서 죽는다’…. 시 작품을 보더라도 김광섭의 ‘저녁에’, 이육사의 ‘청포도’, 기형도의 ‘엄마 걱정’에서 이방원·정몽주·황진이·홍랑의 시조에 이르기까지, 올해 이미 배웠는데 내년에 또 배울 가능성이 큰 제재들이 상당수다. 중복해서 배우면 낭비요, 같은 작품을 다른 학습목표 아래 배운다면 교육 현장의 혼란이다. 국어교사들은 내년 2학년용 교과서를 고를 때 품질 이전에 중복 여부부터 확인하느라 진땀을 뺄 것이다. 이런 사태를 누가 책임질 것인가.

한국교육과정평가원 관계자는 “모든 교과서는 교육과정의 큰 테두리 안에 있다”며 별 걱정 없다는 태도였다. 동일한 교육과정이라도 교과서·교사에 따라 수업 내용이 크게 달라진다는 점을 외면한 소리다. 사실 교육부의 교육과정이라는 것도 7차 교육과정 이후 ‘2007 교육과정’을 만들더니 요새는 다시 ‘미래형 교육과정’이니 ‘2009 교육과정’이니, 한마디로 말해 중심을 못 잡고 있다. 다시 말하지만 백년 대계까지는 안 바란다. 1년 대계라도 좋으니 제대로 세워 실천하라.

노재현 논설위원·문화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