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깐수' 정수일 前교수 e-메일 인터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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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동서문명교류사 연구자인 정수일(67) 전 단국대 사학과 교수가 이번 주말 『씰크로드학』(창작과비평사)과 『고대문명교류사』(사계절)를 동시에 출간한다.

1996년 국가보안법위반으로 구속돼 지난해 광복절 특사로 출감한 뒤 최근 『이븐 바투타 여행기』를 완역(完譯)출간한 데 이어 국내 문명교류사 연구에 또 하나의 큰 획을 긋는 작업을 해낸 것이다.

아직은 언론과 직접 만나기를 주저하는 그를 이메일로 인터뷰했다. 그는 현재 국적이 없어 도서관 출입도 못하는 연구자로서의 불편함을 토로하면서도 자신의 작업에 대한 자신감을 피력했다.

-두 출판사에서 신간이 한꺼번에 나왔다.『이븐 바투타 여행기』도 대단한 역작이었다고 보지만, 번역서와는 또다른 감회가 있을 것 같다.

"이번 신간의 경우 평생 문명교류사 연구에 뜻을 두어 오다가 그 한 결실이라고 생각하니 좀 흐뭇하기는 하지만,부족함에 걱정도 된다.후기에도 밝혔지만 구금되기 전에 집필을 마친 『고대문명교류사』만이라도 살려서 학계에 남겼으면 한다고 법정에서 진술했었다.

간절한 소망이었다.『씰크로드학』은 옥중에서 공부하면서 연구 메모를 했다. 언제 집필하고, 더구나 언제 출판할 것인가는 전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런 덧없던 소망과 상상 못하던 일이 현실로 되니 감회가 더욱 새롭다. 학계의 평가를 기다리겠다."

-지도교수인 김원모 교수도 추천사에서 "발이나 겨우 뻗을 정도의 좁은 공간에서 여름이면 볼펜의 잉크가 녹아나는 찜통같은 더위, 겨울이면 손발이 곱고 동상에 걸리는 강추위 속에서, 방바닥에 책을 포개거나 물통을 엎어놓고 통궤를 만들어 받쳐놓고 글을 썼다니, 그 저술작업이야말로 자기와의 싸움으로 만난(萬難)을 극복한 초인적인 업적"이라고 쓴 것을 보았다.

"옥에 있을 때 '수류화개(水流花開)'란 좌우명을 하나 가지고 있었다.즉 매일 무엇을 하나라도 성취하여 생활이 팍팍하지 않고 물이 흐르고 꽃이 피듯 싱싱하게 해보자는 것이었다.글 한 줄, 메모 한 토막이라도 새 것으로 일상을 채우려고 애써봤다."

-책 서문에서 1백여권의 참고서적을 마련해준 아내 등의 뒷바라지에 대해 고마움을 표했다. 힘든 과정이었을 것이다.

"그들의 옥바라지가 없었더라면 아무 것도 못했을 것이다. 주로 편지로 필요한 서적을 적어 보내면 이곳저곳에서 찾아내서는 면회와서 투명창을 사이에 두고 확인한 다음 들여 보내곤 해주었다."

-두 신간의 가장 큰 차이점은?

"둘 다 '문명교류사'의 학문적 정립을 시도한 책이다. 지금까지 씰크로드에 관한 연구는 주로 교통사적 접근에 머물렀지 문명교류 통로로서의 실체에 관해서는 별로 정리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연구가 종잡을 수 없이 번잡했다. 그래서 나름대로 체계를 잡아 '학(學)'으로의 정립을 시도한 책이 『씰크로드학』이다. 이에 비해 『고대문명교류사』는 통시대적 문명교류사의 고대편으로서, 교류의 역사적 전개를 주내용으로 하고 있다."

-『씰크로드학』에서 실크로드의 개념 확대를 시도하고 있는데.

"그렇다. 유라시아와 아프리카,즉 구대륙만을 서로 있는 문명교류통로가 아니라, 아메리카, 즉 '신대륙'까지를 서로 이어주는 환지구적 문명교류통로로 개념을 확대했다. 여기에는 실크로드를 한반도까지 연장시킨 내용도 포함된다."

-책에서 가장 아쉬운 점은?

"문명교류사 같은 학문은 현지답사를 통한 실증적 연구방법이 필수적이다. 이 책들에도 내 손으로 찍은 유물사진을 실었어야 했는데 중간에 그런 사정이 생겨 그렇게 못했다. 지금이라도 당장 현지를 답사하고 사진도 찍어 문자 그대로 '내 책'을 만들고 싶다."

-거의 하나의 지구촌으로 '세계화'된 21세기에 실크로드학의 정립이 갖는 의미는 무엇이겠는가.

"지난 수천년 간의 인류역사를 훑어보면서 인류가 그토록 염원해왔고, 또 이 세기에도 염원하게 될 공생공영을 실현할 수 있는 대안과 비전은 문명교류에서밖에 찾아낼 수 없다는 것이 나의 소견이다. 이번에 '씰크로드학'이나 '고대문명교류사'의 정립으로 이러한 문명교류의 일단을 부족하나마 학문적으로 밝혀내려고 했다는 데 일단 의의가 있다고 본다."

-최근 미국의 9.11 테러사건과 관련,'문명충돌론'이나 '이슬람근본주의와 미 제국주의의 충돌' 등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문명교류사 연구자로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무고한 민간인들을 그렇게 대량으로 죽인 그 테러의 '죄악상'은 어떤 정치적 대의나 종교적 명분도 가릴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문명충돌'과 '이슬람근본주의'란 두 허상으로는 희생자들의 영혼을 달래지 못한다. 우선 상생관계에 있는 문명간의 만남이란 커다란 물굽이에서 격렬한 소용돌이가 생길 수 있는 것으로 본다면 모를까 '충돌'로 해석하는 것은 말도 안된다. 테러 사건은 문명 대 비문명의 충돌로 설명하는게 옳다. "

-국가보안법으로 구속됐을 당시와 지금, 사회의 변화가 있다고 보는가.또 '외국인' 무하마드 깐수로 살 때에 비해 어쩌면 더 홀가분한 기분으로 연구에 임할 수 있는 점도 있을 듯 싶은데, 현재 연구에 전념하기 가장 어려운 점은 무엇인가.

"분단 비극의 증인이고 체험자로서 하루 빨리 이 비극이 끝장나기를 바랄 뿐이다. 후학 양성이 천생직분이니,강의 요청 등이 있다면 마다하지 않으려 한다. 어려운 점은 책과 씨름하는 것이 본분인데, 신분증이 없다보니 도서관에 가지 못하는 일이다."

-앞으로의 연구계획은?

"원래 장기계획은 문명교류사 세 편을 집필하는 사이사이에 한국대외교류사를 집필하기로 하고 그 첫 편으로 『신라.서역교류사』를 펴냈었다. 이어 '고려서역교류사' 등 한국대외교류통사를 엮어보려고 했는데 무산됐다. 가능하다면 그것을 추진하려고 한다. 내가 못하면 동학이나 후학들이라도 하게끔 할 작정이다. 그리고 '문명교류사사전'은 이미 자료 수집을 7할쯤 해놓았는데 힘이 자라는 대로 마무리하려고 한다. 그밖에 몇 가지 욕심나는 외국어 원전도 번역하고 싶다. 그리고 '문명교류사연구소' 같은 것을 하나 만들어, 적어도 교류사 연구분야에서는 우리가 국제학계의 선두주자가 되고 싶은 것이 비록 종심(從心)에 다가선 인생이지만 갖고 있는 꿈이다. 과욕은 멸욕(滅慾)이라고 했다. 하다가 멸하면 누군가가 뒤이어 해주었으면 해서 이렇게 만용 같은 과욕을 부려본다."

정리=김정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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