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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해신 - 제1부 질풍노도 (73)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7면

김헌창은 태종 무열왕계의 자손으로 그가 6대손이었다면 사내는 9대손이었다. 사내가 반적 김헌창과 같은 태종 무열왕계의 세손이었으면서도 용케 살아남은 것은 전적으로 김균정의 비호 때문이었다.

기록에 의하면 김헌창의 난이 평정된 후 김헌창은 참시(斬屍)되고, 그에 동조한 종족과 당여(黨與) 2백39명은 사형에 처해졌다. 반란에 가담하지 않은 경우라도 태종 무열왕계의 귀족들은 크게 몰락하였다. 골품제에 있어 신분이 감등되거나 장원(莊園)과 같은 경제적 기반을 몰수 당해 중앙 정계로부터 완전히 밀려나버린 것이다.

젊은 사내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다.

『삼국사기』에 이르기를 '그의 집은 대대로 관록(官祿)이 있는 집안으로 장수와 재상을 겸하고 있었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그의 아버지 김정여(金貞茹)는 파진찬(波珍飡)직책에서 하루 아침에 파직 당하고, 대대로 소유하고 있던 장원을 몰수 당해 버렸던 것이다.

그나마 젊은 사내가 비록 한직이었지만 고성과 충주에서 지방장관을 연임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김균정의 총애 때문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젊은 사내가 충주에 대윤으로 영전되어 간지 2년만에 이번에는 반역의 소굴이었던 무진으로 전임시켜 달라고 소청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더구나 무진은 반적 김헌창이 도독으로 있으면서 세력을 키웠던 반향(反鄕)이 아닐 것인가.

김헌창은 자신이 도독으로 있었던 무진과 완산주 지금의 진주인 청주(菁州), 공주인 웅주 등을 주무대로 해서 반란을 일으켰으며 한 때는 충청도.전라도 거의 전 지역과 경상도의 서남부까지 장악하여 신라의 사직을 위태롭게까지 하였던 대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따라서 태종 무열왕의 9대손인 젊은 사내가 자신을 무진의 도독으로 전임시켜 달라고 소청하는 것은 김우징의 호통대로 '제 정신이라면 감히 말을 할 수 없는 어불성설'이었던 것이다.

"네놈이 지금 이곳에 온전히 살아 앉아있는 것만 하여도 어르신의 은덕 때문인데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그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이냐."

김우징은 집안이 떠나도록 호통을 치며 말하였다. 김우징의 분노 역시 당연한 일이었다. 기록에 의하면 김헌창의 반란이 일어났을 때 아버지 김균정과 김우징은 주력부대인 삼군을 맡아 직접 원장(員將)으로 나서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것이다.

이때 아버지 김균정은 반적이 쏘는 유시(流矢)를 어깨에 맞아 아직도 왼쪽 손을 제대로 쓰지 못하는 부상까지 입고 있었던 것이다.

"시중 나으리."

김우징의 호통을 꿇어앉은 자세에서 묵묵히 받아들이던 사내는 어느 정도 흥분이 가라앉자 비로소 입을 열어 말하였다.

"신이 무진의 도독으로 전임하려 하는 것은 사사로운 영달 때문이 아니라고 이미 말씀드렸나이다. 이는 큰 덕을 베풀어주신 두 어르신께 조금이나마 은혜를 갖기 위해서이나이다."

그러자 아버지 김균정이 아들 김우징의 의분을 가라앉히면서 부드럽게 말하였다.

"일단 위흔(魏昕)의 입에서 그러한 말이 나왔으니 경위는 들어 보기로 하자꾸나."

위흔은 젊은 사내의 자(字)로 사내의 이름은 김양(金陽)이라 하였다. 그는 2년 전 흥덕대왕을 진알하기 위해서 말을 타고 궁전으로 입궐하는 장보고를 군중 사이에 끼어 보면서 '봐라, 저자는 백제인이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처럼 위풍당당하게 말을 타고 대왕마마를 배알하기 위해서 입성할 수 있단 말인가'하고 비분강개하였던 바로 그 사내였던 것이다.

"나으리."

기다렸다는 듯 김양은 입을 열어 말하였다.

"신이 무진의 도독으로 가고 싶은 것은 바로 그곳이 반역의 땅이기 때문이나이다. 그 반역의 땅에 또다시 새로운 역모의 기운이 솟아오르고 있음을 감지하였기 때문이나이다."

"역모라니."

김균정이 크게 놀라며 물었다.

"도대체 무슨 소리냐."

"나으리, 무진에서 가까운 청해 땅에 2년 전 백제인 한사람이 대사로 제수되어 내려가지 않았나이까."

청해에 대사로 제수되어 내려간 백제인,그의 이름은 바로 장보고였다.

글=최인호

그림=이우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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