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몽드지 기고] 세계적 석학 독일 울리히 벡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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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신자유주의는 종언을 고하는가. 세계적 석학인 독일 사회학자 울리히 벡(사진)은 프랑스 일간지 르몽드 10일자에 실은 기고문에서 "무적(無敵)으로 여겨지던 신자유주의의 승리 행진이 9.11 테러와 함께 끝났다"고 진단했다. 그는 붕괴의 위기 앞에서 경제적 처방만 내리는 것은 허황한 이론이며 전지구적 차원의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경제적 세계화와 함께 세계주의 정치가 병행돼야 한다고 역설했다.

다음은 기고문 요약.

9.11 테러와 탄저균 공포로 더 이상 덮어둘 수 없는 한 가지 문제가 마침내 드러났다. 경제의 짧은 치세(治世)가 끝나고 정치가 다시 우위에 서느냐는 문제다. 9.11 테러는 세계경제에서 체르노빌 원전 사고와 비견할 수 있는 사건이다.원자력의 혜택을 체르노빌에 묻었듯 이제 우리는 신자유주의의 장밋빛 약속들을 땅에 묻는다.

전지구적 위기 속에서 정치와 국가를 경제가 대체한다는 신자유주의 질서는 급격히 설득력이 떨어졌다.좋은 예가 미국의 항공보안 민영화다. 오래 전부터 미국이 테러 공격의 표적이 돼 왔다는 점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유럽과 달리 미국은 '고용의 기적'을 위해 항공보안을 민영화했다. 결국 검색시스템이 패스트푸드 아르바이트에도 못미치는 임금과 고용 불안에 허덕이는 임시직 근로자들의 손에 맡겨졌다. 규제완화.자유화.민영화로 대변되는 신자유주의 개념이 미국을 테러에 취약하게 만든 것이다.

세계 주요 언론의 경제해설가들은 테러 이후에도 신자유주의는 계속 작동할 것이라고 말한다. 대안이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주장은 틀렸다. 그들의 머리 속에나 대안이 없을 뿐이다. 신자유주의는 정치와 국가의 지나친 간섭이 실업.빈곤.경제위기 등 국제문제의 근본원인이라고 주장해 왔다. 규제완화와 시장의 세계화가 국제적 차원의 빈부격차와 인도적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고 약속해 왔다.

하지만 위기의 시대에 신자유주의는 꿀먹은 벙어리가 됐다. 테러 위협은 신자유주의의 승리에 짓눌렸던 본질적 진리를 다시 일깨워준다. 정치와 유리된 세계경제는 허황한 것이라는 진리 말이다.

국가와 공공서비스 없이는 안보도 없다. 세금 없이는 국가도 교육도 정치도 치안도 민주주의도 없다. 민주주의.여론.시민사회 없이는 합법성도 없다. 합법성 없이는 안보 또한 없다. 이로부터 우리는 국가와 국제기구 없이 사법적 판단에 따른 분쟁의 비폭력적 해결은 있을 수 없으며 궁극적으로 어떤 형태로든 세계경제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렇다면 신자유주의의 대안은 어디서 찾아야 하는가. 테러 이후 국가들은 안보를 위한 초국가적 협력의 필요성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갑자기 신자유주의와는 상반되는 원칙, 즉 국가의 필요성이 세계 도처에서 다시 나타난 것이다.

세계화에 저항하던 테러는 당초 자신들이 겨냥했던 목표와는 정반대의 결과를 가져왔고 정치와 국가의 세계화라는 새로운 시대를 도래시켰다. 공조와 협력에 의한 정치의 초국가적 개입이 그것이다. 테러의 근본원인을 세계화 탓으로 돌릴 수 없는 것은 자명하다. 하지만 경제적 세계화를 세계주의 정치와 결합할 필요가 있다.

세계화로 득을 보던 국가들과 세계화의 위협을 느끼던 국가들 사이의 간격은 9월 11일로 사라졌다. 세계화에서 소외된 국가들을 돕는 것은 인도적 요구일 뿐만 아니라 서구의 가장 본질적 이해인 안보의 열쇠다.

제2,제3의 오사마 빈 라덴을 생산해내는 병원(病原)을 제거하기 위해 세계화의 위험을 보다 가까이서 직시해야 하며 자유와 세계화의 결실을 보다 공평하게 나눠야 한다. 국제적 협력 가능성의 재발견 속에서 위협이 될 수 있는 것은 민주주의의 자유와 시장의 자유가 안보의 제단 앞에서 희생되는 요새국가의 탄생이다.

다국적 기업과 초국가적 경제기구,비정부기구(NGO)와 유엔은 종교.국가적 다양성과 인간의 기본권,세계화를 모두 고려한 개방된 세계의 가능성을 여는 시스템을 만드는 데 동참해야 할 것이다.

정리=이훈범 파리 특파원

*** 울리히 벡은…

울리히 벡(57) 독일 뮌헨대 교수는 위르겐 하버마스.앤서니 기든스 등과 함께 현대 유럽에서 가장 주목받는 사회학자다.벡 교수는 서구를 중심으로 추구해온 산업화와 근대화 과정이 실제로는 가공스러운 '위험사회'를 낳는다고 주장하고, 현대사회의 위기화 경향을 비판하는 학설을 내놓아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그는 최근 국가와 정치가 경제적 합리성을 주장하는 시장의 논리에 의해 무력화되고 있다면서 지구촌의 신자유주의 경향을 질타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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