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사람 사람] 소설가 김성동씨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2면

"현실을 뒤로 하고는 어디서도 정토(淨土)를 찾을 수 없다"며 산문(山門)을 나섰던 소설가 김성동(金聖東.54)씨. 그가 "젊음의 혈기와 조금 깨우친 것만으로는 현실을 변혁할 수 없다"며 환속(還俗)25년 만인 이달 초 강원도 진부 산 속 깊숙이 들어가 선원(禪院)을 일구고 있다.

때맞춰 그를 산문에서 저자 거리로 내몬 출세작인 장편소설 『만다라』도 22년 만에 전면 개작해 이번 주말 도서출판 깊은강에서 펴낸다.

『만다라』는 구도의 길에 나섰으나 번뇌와 방황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결국 파계하고 만다는 일종의 자전적 소설. 소설의 주인공인 법운은 술.담배.여자를 즐기는 선배 승려 지산에게 "개판인 세상을 정화하기 위해 우선 스스로를 정화한 뒤 사회를 정화하라"며 맞선다.

그러나 그는 지산이 죽은 뒤 '피안행 차표', 즉 자기 정화 내지 구도의 길을 저버리고 저자 거리로 향한다.

그러나 개작 『만다라』에서 법운은 "입선(入禪)을 알리는 죽비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며 '피안행 열차'를 타고 구도의 세계로 들어간다.

이번 작품은 결말이 정반대로 바뀌었고, 지산의 맹목적.반항적인 방황이나 정치.사회의 부조리에 대한 비판과 투쟁의 목소리도 많이 누그려뜨려 사회성이 빠졌다. 구도(求道)소설로 향하게 한 것이다.

그리고 金씨도 다시 현실을 버리고 구도의 세계로 들어갔다. 1980,90년대 진보적 문학 진영의 중추로 그토록 개혁을 요구하던 그를 무엇이 '스스로 중'이 돼 다시 산 속으로 들어가게 했는가.

"지난해 8월 장마 때 몇년간 공들여 구상해 놓은 소설 초고가 모두 떠내려갔다. 우두망찰하여 툇마루에 쭈그리고 앉아 소설도, 삶도 작파하려 하는데 홀연 뭔가 떠올랐다. 큰 물에 떠내려온 건지, 땅 속에서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인지 몰라도 돌부처가 아닌가. 방안에 모셔놓고 들여다보니 슬픈 표정을 지닌 미륵불임에 틀림없었다."

그때부터 金씨는 슬픈 중생의 얼굴을 한 높이 40㎝ 가량의 그 부처를 '슬픈 미륵'이라 부르며 아침마다 예불했다. 미륵 세상을 열겠다던 옛 궁예의 땅에서 발굴된 미륵불. 개혁과 천지 개벽에는 실패해 슬픈 얼굴이더라도 누굴 원망하지 않고 묵묵히 또 억겁을 수행할 것이다.

중생에게 영원한 희망을 주기 위해선 작은 깨달음으로 세상을 개혁한다고 설치지 말고 더욱 겸손해지고 깨우쳐야 한다는 것을 金씨는 알았다. 그는 이제 슬픈 미륵의 얼굴로 11월의 숙연한 산 속으로 깊숙이 들어갔다.

이경철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