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외교장관·유엔의장 양립할 수 있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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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외교통상부가 또다시 국민을 실망시키고 있다. 외교부는 7일 중국에서 사형당한 한국인 마약 사범 申모씨 사건을 둘러싼 그 동안의 '망신 외교'에 대한 문책과 대응을 발표했다. 한승수(韓昇洙)외교부 장관은 대국민 사과를 하고 담당 영사 및 지휘.감독자에게 엄중한 책임을 묻겠다고 밝혔다.

또 1백24개 재외 공관 중 총영사가 없는 62개 중소 공관의 경우 공관 차석이 총영사 또는 영사직을 겸임토록 하고 이날자로 일괄 발령했다. 하지만 외교부의 이런 대책은 사태의 본질을 외면한 면피성 대책에 불과하다.

우선 문책 범위와 대상이 잘못됐다. 지휘.감독의 책임이 있는 공관장과 본부 책임자들에 대한 문책 없이 현장 실무자 5~6명만을 처벌하겠다는 것은 말도 안된다.

국민이 이번 사건에 분노하고 외교 부재에 절망하는 이유는 자국민 보호라는 가장 기본적이고 본질적인 외교의 목표를 우리 외교관들이 망각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외국에 공관을 유지하고 외교관을 파견하는 것은 국익을 수호하고 재외 국민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이번 사건을 영사관 업무 소홀로 보고 총영사와 담당 영사만의 책임으로 문책대상을 축소하고 있다. 당시 대사였던 두 전직 대사는 문책 대상에서 빠졌다. 총영사라는 직책이 없어서, 또 공관 차석이 영사를 겸직하지 않아서 재외 국민을 보호할 영사 업무를 등한히한 게 아닌데도 '영사직 겸직'을 대책으로 내놓고 있다.

이런 문책과 이런 대책으로선 한국 외교의 환골탈태를 결코 기대할 수 없다. 또 이런 식의 대책으로는 외교부 내에 팽배한 "재수없이 일이 발생해 담당자만 처벌됐다"는 냉소주의를 확산시키면서 힘있고 '빽'있는 직원들이 영사 업무를 더욱 더 멀리 하게 하는 경향을 부추길 뿐이다.

둘째, 한승수 장관의 유엔총회 의장 겸직에 대해서도 분명한 입장 정리가 있어야 한다. 유엔총회 의장으로서의 국제적 활동이 한국의 위상과 외교력을 높이는 데 기여함을 폄하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남북문제를 비롯해 대일.대러.대중 외교에서 연이은 실책을 저지르고 있음을 미뤄볼 때 과연 두 직책이 양립할 수 있느냐는 심각한 의문이 든다. 유엔총회 의장은 그대로 유지하되 외교부 장관은 별도 임명하는 게 우리의 당면한 여러 외교 현안을 효과적으로 풀어가는 방안일 것이다.

끝으로 외교부는 공관 차석의 총영사직 겸직과 같은 미봉책이 아니라 주재 공관의 지역적 특성과 직무를 재검토하고 냉전 후 변화된 외교 환경에 맞게 외교의 목표와 체제를 재편해야 한다. 현재 한국 외교는 기로에 서 있다.

유엔총회 의장국에, 아시아의 주도적 핵심 국가로서 세계적인 수준의 책임과 의무를 논하는 화려함의 뒤편엔 꽁치 외교의 늑장 대응, 탄도탄요격미사일(ABM)제한협정 문안 파동과 같은 실패 사례가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확실한 문책, 외교 수장(首長)의 제자리 찾기, 영사 업무의 획기적 개선안 등이 이번 기회에 새롭게 검토돼야만 우리 외교가 바로 설 수 있는 전기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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