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해신 - 제1부 질풍노도 (67)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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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흥덕대왕의 입에서 흘러나온 수수께끼의 말.

신라의 흥망성쇠가 바로 장보고에 달려있다는 흥덕대왕의 말은 실로 난해한 수수께끼가 아닐 수 없음이었다.

"그대는 이 말의 뜻을 알고 있는가."

느닷없이 흥덕대왕이 묻자 김충공이 빙그레 웃으며 대답하였다.

"본시 동근생(本是 同根生)인데 상전하태급(相煎何太急)하십니까."

이 말은 '본래 한 뿌리에서 함께 태어났는데, 어찌 서로 괴롭히기를 이와 같이 심하게 하십니까'라는 뜻으로 일찍이 조조의 셋째 아들 조식(曹植)이 그의 형 조비(曹丕)가 괴롭히자 '콩을 삶기 위해서 콩대를 태우나니 콩이 가마솥에서 소리 없이 우노라, 본디 같은 뿌리에서 같이 태어났거늘 어찌 이렇게 심하게 괴롭히십니까'라고 읊었던 유명한 7보시(七步詩)를 빌어왔던 것이었다.

그러니까 김충공의 말은 대왕마마와 자신은 비록 임금과 신하의 관계지만 본래 한 형제이므로 서로 속뜻을 알고 있다라는 의미를 암시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으하하하, 그러하신가."

갑자기 유쾌하게 흥덕대왕이 웃으며 말하였다.

"그대가 내 속마음을 이미 알고 있음이란 말인가, 좋다."

흥덕대왕은 종이와 붓을 아우에게 내밀며 말하였다.

"우리가 서로 이 종이 위에 그 속마음을 각자 쓰기로 하세. 무엇이 나라의 국운을 흥망성쇠케 할 것인지 그것을 각자 써보기로 하세나. 만약 그 마음이 같다면 우리 두 사람은 그대의 말대로 한 뿌리에서 태어난 동근생(同根生)일 것이며 아니면 서로를 괴롭히는 콩과 콩대일 것이네."

"좋습니다."

김충공도 선선히 대답하였다.

두 형제는 서로 안보이도록 돌아앉은 후 각자 종이 위에 쓰기 시작하였다. 유난히 우의가 좋았던 흥덕대왕과 김충공은 어렸을 때부터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이런 식의 문답논리를 즐겨 해왔던 것이었다.

먼저 흥덕대왕이 글씨를 쓰고 돌아앉았다. 곧 김충공도 문자를 쓴 후 돌아앉았다. 그리고 두 형제는 서로 웃으면서 마주 보았다.

"그러면 우리 두 사람이 쓴 종이를 서로 바꾸기로 하지."

두 사람은 쓴 종이를 서로 바꾸었다. 그리고 먼저 흥덕대왕이 그 종이를 펼쳐보았다. 그 종이 위에는 다음과 같은 글씨가 쓰여 있었다.

'貿易'

그러니까 동생 김충공은 형 흥덕대왕이 말하였던 신라의 흥망성쇠는 바로 '무역'에 달려있다고 생각하였던 것이었다. 김충공도 종이를 펼쳐보았다. 그 종이 위에도 다음과 같은 글씨가 쓰여 있었다.

'貿易'

과연 그 형의 그 동생이었다. 두 사람은 마치 한 뿌리에서 함께 태어났을 뿐 아니라 그 속마음에 있어서도 일맥상통하고 있었던 것이다.

'무역(貿易)'

흥덕대왕은 신라의 국운이 바로 무역에 있음을 꿰뚫어 보았던 뛰어난 영주(英主)였던 것이다. 바야흐로 밀려오는 페르시아의 문물,엄청나게 발전되어가고 있는 당나라의 문명, 그 틈에서 쇠퇴해가고 있는 신라의 국운을 융성케 하는 유일한 길은 '무역'임을 흥덕대왕은 바로 장보고를 통해 깨닫게 된 것이었다.

흥덕대왕이 '무역'에 얼마만큼 큰 비중을 두고 있었는가는 그가 남긴 능비의 단석에 남아있는 명문(銘文)이 바로 그 증거인 것이다.

'무역지인간(貿易之人間)'

오늘날 경주국립박물관에 남아 있는 귀중한 자료인 이 단석을 통해 더 이상 국가와 국가의 공무역이 아닌 사무역을 통해 신라의 국운을 다시 부흥시키려는 흥덕대왕의 강력한 의지를 볼 수 있으며, 해신(海神) 장보고의 탄생은 바로 이런 흥덕대왕의 의지가 빚어낸 결과임을 미뤄 짐작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장보고를 통해 '무역지인간(貿易之人間)'의 큰 뜻을 세우려 했던 흥덕대왕은 그러나 자신의 큰 뜻을 펴지 못하고 그로부터 8년 뒤인 836년 죽는다.

이 때의 기록이 『삼국사기』에 간단하게 나와 있다.

"12월에 왕이 돌아가니 시(諡)를 흥덕이라 하고, 조정이 왕의 유언에 따라 장화(章和)왕비 능에 합장하였다."

오늘날 흥덕대왕의 능은 경주시에 장화왕비와 합장되어 남아있다.

글=최인호

그림=이우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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