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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에 조선이 갈팡질팡할 때 화가들의 붓끝도 어지러웠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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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운미 민영익 ‘묵란(墨蘭)’, 종이에 수묵, 61.3X124.2㎝. [간송미술관 제공]

‘500년 조선왕조가 망할 때 화가들은 무슨 생각을 하며 뭘 그리고 있었을까.’ 일제 침략으로 국권을 빼앗긴 1910년 한일병합 100주년을 맞는 올해, 서울 성북동 간송미술관이 봄 정기기획전의 주제로 삼은 질문이다. 거꾸로 말하자면, 당대의 그림들 속에서 조선이 왜 망했는지 찾아볼 수도 있다는 얘기다.

조선 성리학은 노쇠하고 청조 고증학 도입은 개혁 실패로 물 건너간 당시, 서구문화를 등에 업은 일제가 한일병합조약을 강제로 체결하니 등잔 앞에 흔들리는 시대상황을 반영한 그림은 당대의 혼란과 고뇌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전통 계승에 목숨을 건 이, 현실에 부응해 팔리는 그림을 그린 이, 화업(畵業)을 독립운동 삼은 이, 일제에 붓으로 아첨한 이, 세상에서 돌아앉아 자연 속에 은둔한 이…. 복잡 미묘한 개인 노선들이 춤을 춘다. 주도 이념 없이 밀려오는 서구 문명 앞에서 갈팡질팡한 세태가 그림에 고스란히 박혀있다.

16~30일 열리는 ‘조선망국 백주년 추념회화’전은 당시 60세였던 서병건(1850~?)부터 24세였던 고희동(1886~1965)까지 28명 화가의 그림 100여 점으로 망국시기의 문화계 천태만상을 보여준다.

전통을 지키려 ‘조선서화미술회’를 설립한 심전(心田) 안중식(1861~1919)과 소림(小林) 조석진(1853~1920)은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 고민하며 동분서주했지만 우리 식으로 해석한 중국취향 장식풍으로 흐르는 한계를 드러냈다.

소림 조석진 ‘달빛 아래 잠든 개’, 비단에 담채, 26.0X14.5㎝.

조석진의 ‘달빛 아래 잠든 개(月下睡狗)’는 방만하고 해이하며 나태한 개의 묘사로 망국기 지식인의 무기력을 전한다.

12세 어린 나이에 의병에 입문해 항일광복운동에 참여한 일주(一洲) 김진우(1883~1950)는 칼날 같은 대나무 그림으로 항일의지를 상징한 당대 최고의 묵죽화가였다. 일주처럼 그림을 무기삼지는 않았으나 난초의 원숙한 경지를 일군 운미(芸楣) 민영익(1860~1914) 또한 철심을 박은 듯 굳건한 난 그림으로 조선 난법(蘭法)의 마무리를 지은 큰 화가로 빛난다.

세상이 어지러울 때 사람을 알아보기 쉽다고 했던가. 나라 잃은 부끄러움을 가슴에 품고 관악산 백련봉에 은둔한 지운영(1852~1935), 일제가 제안한 작위를 거절하고 서울 근교 장위산 밑에 은거하며 추사(秋史)의 문인화풍을 이은 고졸한 서화를 내놓은 윤용구(1853~1939)는 그림 자체가 그들의 삶을 말해준다.

전시를 기획한 최완수 한국민족미술연구소 연구실장은 “과거의 거울에 비추어 과연 현재 우리 모습은 어떤가 살펴보자는 뜻도 담은 간송의 78번째 전시”라고 말했다. 무료. 02-762-0442.

정재숙 선임기자

☞◆간송미술관=일제강점기 간송(澗松) 전형필(1906~62)이 사재를 털어 수집한 문화재를 수장, 연구, 전시해온 한국 최초의 사립미술관. 1971년부터 해마다 봄, 가을로 정기전을 열어 국보급 유물을 주제별로 선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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