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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재정위기 국제공조 시동] 전문가가 본 그리스 국민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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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4면

9일(현지시간) 그리스 아테네의 국회의사당 밖에서 한 시위대가 피켓 뒤에 앉아 있다. 피켓에는 ‘유럽의 지원을 원하는데, 유럽은 어디에 있나?’라는 문구가 쓰여 있다. [아테네 AFP=연합뉴스]

나라가 벼랑 끝에 섰는데 그리스 국민은 왜 화염병을 들었을까. 우리로선 이해가 잘 되지 않는 그리스인의 정서를 유재원(60) 한국외국어대 그리스·불가리아어과 교수에게 물었다. 유 교수가 핵심을 짚어주고 기자가 살을 붙였다.

그리스인은 자유인이다. 한국인은 위기가 닥치면 공동체를 생각한다. 그러나 그리스인은 개인이 우선이다. ‘나에게 무슨 이득이 있느냐’부터 생각한다.

재정위기에 대해 그들은 ‘내가 뭘 잘못했느냐’고 자문했을 것이다. 그러나 답을 찾지 못했고, 그래서 거리로 나왔다. 정치인과 정부에 대한 분노는 그렇게 나온다. 이런 의식은 그리스 신화에 녹아 있다. 그리스 신화 속 영웅은 신이나 마법사가 아니다. 각 분야에서 최고의 경지에 오른 ‘개인’이다. 트로이 목마로 유명한 오디세우스는 신이 아니라 ‘1등 전략가’일 뿐이다.

그리스인은 개인의 자유를 위해 전쟁을 불사하기도 했다. 페르시아 전쟁(기원전 492~448년)이 대표적이다. 전쟁 전 아테네와 스파르타 등은 툭하면 다퉜다. 거대 제국인 페르시아의 왕이 보기엔 한심했다.

“그렇게 싸우느니 내 밑으로 들어와라. 공정하게 대접하겠다.”

그리스인의 대답은 ‘노’였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간섭 없이 사는 걸 택했다. 페르시아 전쟁은 ‘남의 영웅 밑에서의 평화’를 거부한 그리스인의 자유인 기질에서 시작됐다.

재정위기와 관련된 그리스 일간지 ‘투 비마(걸음)’의 여론조사(9일자)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 조사 결과 과반수(55%)가 긴축이 불가피하다고 답했다. 그런데 시위가 옳다는 응답(53%) 역시 과반을 넘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란 건 아는데, 그렇다고 개인 의견을 억누르면서 말없이 받아들이진 않겠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리스인이 한번 방향을 잡으면 무섭다. 1940년 이탈리아의 독재자 베니토 무솔리니는 이집트 정벌을 위해 그리스를 통과하려 했다. 그때 그리스인은 싸웠다. 파시즘의 서슬이 시퍼럴 때였지만 개인의 판단이 ‘잘못된 일’이라는 쪽으로 모이자 그들은 응집력을 발휘했다.

이번 재정위기도 마찬가지다. 국론이 모이는 데 시간이 걸리겠지만, 결국은 이겨낼 것이다. 개인을 앞세우는 그리스인들이지만 나라가 망할 정도로 끝장을 본 적은 거의 없다. 1071년 비잔틴제국 시절 셀주크 군과 벌인 만지케르트 전투의 패배가 대표적인 실패인데, 그때도 일반 국민이 아니라 귀족의 배신이 원인이 됐다.

시위가 격렬해진 데는 반미 의식도 작용했다. 그리스는 유럽의 대표적인 반미 국가다. 2004년 그리스 올림픽은 이런 의식을 더 강화시켰다. 미국은 그리스에 매우 엄격한 보안 체제를 요구했고, 이 바람에 올림픽을 치르는 비용이 애초 계획의 두 배가 넘는 100억 유로로 늘었다. 당초 계획의 네 배를 썼다는 분석도 있다. 이게 고스란히 빚으로 남았다.

게다가 미국 투자은행인 골드먼삭스가 그리스 재정적자를 실제보다 적게 보이도록 조작하는 데 일조했다는 외신 보도가 있었다. 이 때문에 그리스에선 재정위기를 미국이 유도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적지 않고, ‘그리스 길들이기’라는 음모론이 퍼져 있다.

민간이 아닌 공공 노조가 시위를 주도하는 것은 1981년부터 2003년까지 1년 반 정도를 빼고는 좌파 정권이 집권한 영향이 크다. 그 사이 국유화가 급격히 진행됐고, 공기업이 전체 국내총생산(GDP)의 40%를 차지할 정도로 커졌다. 공기업이 그리스 경제의 주축이기 때문에 공공 노조의 힘이 셀 수밖에 없다.

김영훈 기자

◆유재원 교수=국내에서 손꼽히는 그리스 전문가. 경기고·서울대를 나왔다. 1975~83년 그리스 아테네대 대학원(언어학 박사)에서 수학했다. 언어학은 역사와 문화에 대한 이해가 필수인 학문이다. 저서로 『그리스 신화의 세계 1·2』 『터키, 1만년의 시간 여행』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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