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산은 산 물은 물 (106)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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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106. 法難과 종정 취임

성철 스님을 모시고 살면서 가장 아찔했던 순간이라면 1980년 10월 27일,흔히 말하는 '10.27 법난(法難)'일 것이다.

'10.27 법난'이란 그 날 새벽, 25개 본사를 비롯한 전국 주요사찰에 군병력이 들이닥쳐 일대수색에 들어가 주지 이하 소임자들을 무조건 연행해간 사건이다.

5공 정권 출범 초기에 벌어진 여러가지 비극적 사건 중 불교계에서 잊을 수 없는 깊은 상처다.

백련암이 워낙 높은 산중에 있어서인지 사건이 시작된 것은 오전 9시쯤이나 되어서였다.소총끝에 칼까지 꽂은 군인 두 명이 올라왔다.젊은 군인은 눈을 부라리며 소리부터 질렀다.

"성철이가 누구야! 같이 가야겠으니 빨리 나오라고 해!"

정말 어처구니가 없었다. 새파란 젊은 군인이, 성철 스님이 누군지도 모르면서 이름부터 불러대다니.

급히 방에 들어가 산 입구에 있는 큰절로 전화를 해 상황을 파악해봤다. 주지 스님은 새벽에 군인들이 들이닥친다는 얘기를 전해 듣고는 일단 산을 넘어 어디론가 사라졌다고 한다. 대신 다른 주요 소임을 맡은 스님들이 끌려갔고, 지금 대웅전 앞에는 착검한 군인들이 삼엄하게 둘러서 있다는 얘기를 듣고는 앞이 캄캄했다. 예사 상황이 아니고, 그렇다고 큰스님이 붙들려가는 것을 보고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시간을 벌려고 일단 둘러댔다.

"성철 스님은 아침마다 산책을 나가시는데 산에 올라가면 보통 한두 시간은 걸리니 마음 놓고 기다리시지요."

급히 산길을 올라와 피곤한듯 군인들은 순순히 "그래요. 그렇다면 기다려보지"라며 수색에 나서지는 않았다. 대신 부동자세로 마당에 서 있었다. 그러니 큰스님을 피하게 할 수도 없고, 초조한 마음에 지루한 시간만 흘러갔다. 한참 기다리다가 군인들에게 다가가 물었다.

"뭔가 잘못 알고 온 것 아니요. 이런 고즈넉한 암자에 사는 스님이 무슨 죄를 짓겠소."

말이 통할 리가 없다. 군인은 무뚝뚝하게 내뱉었다.

"상부명령이 꼭 연행해 오라는 것이니까, 우리는 그냥 연행해가기만 하면 되는 거지 다른 거는 모릅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 다시 군인을 구슬렀다.

"그러면 그냥 무작정 기다릴 것이 아니라, 지금 이쪽 상황을 큰절에 있는 상관한테 설명하고 다시 명령을 받아보는 것이 안낫겠소."

기다리던 군인들도 지루하고 피곤하던 터라 내 말에 귀가 솔깃했다. 어딘가로 전화를 하더니 "철수하자"며 내려가버렸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큰절로 내려가보니 각종 소임을 맡은 스님들은 도망치고, 숨고, 잡혀가고 하는 바람에 누가 어디에 있는지조차 확인이 되지 않았다. 이렇게 전국적으로 대부분의 큰스님들과 주지 스님들이 계엄사령부에 잡혀가 꽤나 곤욕을 치러야 했다.

당시 스님들이 분개한 것은 일부 절에서는 간첩이나 수배자들을 잡는다며 군화를 신은 채로 법당을 들락거리고,심지어 일부 비구니 스님들의 소지품까지 조사한 상식밖의 행패들이었다.

법난 직후 종단을 추스르기 위한 움직임이 이어졌다. 조계종불교중흥위원회가 구성되고 법주사 탄성스님이 위원장이 돼 종단 집행부를 만들어갔다.

그리고 81년 1월 10일 원로회의에서 성철 스님을 만장일치로 7대 종정으로 추대하게 됐다.

백련암에서 화를 피한 성철 스님은 서울 사정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모르고 있었는데, 어느날 서울에 머물던 도반(道伴.구도행의 동반자) 자운 스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급히 성철 스님을 찾았다. 전화를 받은 성철 스님의 목소리가 긴장됐다.

"뭐! 가만 있으라고. 종단이 어려우니 안한다는 말 하지 말라고. 그런 법이 어디 있노. 한마디 상의도 안하고."

한참을 듣더니 "음…, 알았소"라며 전화를 끊는다. 그러고는 뒷짐을 지고 한참 방안을 맴돌았다.

"거참! 어렵게 됐네. 안한다는 말도 못하게 하네…, 쯧쯧."

자운 스님이 종단의 어려움을 설명하면서 무조건 종정직을 맡으라고 강청한 것이다. 이렇게 해 '성철 종정'시대가 열렸다.

원택 <성철스님 상좌>

정리=오병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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