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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팔 끓는 물에 살짝 데쳐 내면~ 연하고 쫄깃쫄깃, 봄 갯벌의 선물

중앙선데이

입력

"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해물이야말로 계절을 많이 타는 재료다. 식물은 온실에서 키울 수라도 있다지만, 해물 재료들은 아직도 많은 부분을 자연적인 사계절이 흘러가는 대로 자라고 먹게 된다. 겨울에 병어회를 먹고 여름에 숭어회를 먹는 것은 매우 바보 같은 짓이다. 정말 이것이 같은 생선일까 싶을 정도로 맛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제철 없이 그저 아무 때나 먹는 해물이란, 냉동한 조기 새끼, 얼린 횟감 참치, 수입 동태 같은 수입 냉동 해물들뿐이다.

봄이 되면 갯벌도 봄을 맞는다. 어느 해인가 매주 홍성에 강의를 하러 다닌 적이 있었는데, 그해에는 정말 해물 덕분에 황홀한 봄을 보냈다. 지금 와서 생각하니 학생들에게는 정말 미안한 일이지만, 솔직히 말해 염불보다 잿밥 밝히는 격이었다. 강의를 하러 서해대교를 타고 홍성으로 향하는 그날 내 머릿속의 하이라이트는(강의가 아니라) 그 근처 오일장을 돌아다니며 해물을 사는 일이었다. 차로 10~20분 거리에 있는 갈산, 광천, 홍성 등에서 돌아가며 오일장이 열리므로, 현지 사람에게 물어보아 날짜 맞춰 찾아가면 늘 싱싱한 해물을 만날 수 있었다.

거기에 가서야 비로소 나는 바지락과 주꾸미가 봄에 제철이라는 것을 알았다. 작은 비닐봉지에 물과 함께 담겨 있는 바지락만 늘 보고 살았던 나로서는, 커다란 바지락 함지박 가득가득 싱싱한 바지락들이 일제히 분수처럼 물을 뿜는 모습이 그저 놀라울 뿐이었다. 정말 저것이 바지락 맞을까 싶을 정도로 통통하게 살이 오른 바지락들은 긴 발을 내밀고 함지박 안에서 놀고 있다.

게다가 주꾸미는 또 어떤가. 너무 생생해서 함지박 바깥으로 기어 나오는 놈들을 집어넣기가 바쁘다. 밴댕이 말리는 것은 어디에서나 볼 수 있고, 재수가 좋은 날은 생물 밴댕이가 수북수북 쌓여 있는 것을 만나기도 한다. 어느 날은 함지박 안에서 눈을 껌뻑껌뻑 하고 있는 간제미(노랑가오리)를 구경하느라 한동안 넋을 잃었다.

그날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은 온통 갯가의 냄새로 꽉 찼다. 차에 냄새 배는 게 문제랴. 이렇게 좋은 구경을 하고 맛있는 것을 먹을 수 있는데. 그리고 그날부터 사나흘은 바지락 국, 주꾸미 숙회, 간제미 찜, 소라 숙회, 밴댕이 구이 등 온통 싱싱한 해물들만 밥상에 오른다.

이렇게 한 해 봄을 ‘학습’한 결과, 이제는 봄만 되면 바지락을 찾는다. 이런 계절에 물 담긴 비닐포장지 속의 바지락을 사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는다. 이런 바지락은 일반적으로 알이 잘고 먹을 것이 없다.

4, 5월에는 웬만한 시장 생선가게에도 바지락을 함지박에 담아 판다. 서해안 산지에서 직접 사는 것만큼 싱싱하지는 않아도, 역시 제철 바지락이라 살이 통통하게 올라 있다. 소매에서도 ㎏당 가격이 5000원쯤인데, 이때만은 통 크게 1, 2㎏씩 사다가 놓고 원 없이 먹는 게 좋다.

제철의 싱싱한 해물은 단순하게 조리하여 오로지 재료 맛을 살려서 먹는 것이 최고다. 조개를 껍데기째 잘 씻어 건진 뒤 팔팔 끓는 물에 쏟아부어 살짝 익혀 먹는 것이다. 조갯살 맛으로 먹으려면 물이 끓을 때 조개를 넣고, 국물을 내어 먹으려면 찬물에 넣어 끓이는 것이 좋다. 조개 같은 해물은 오래 삶을수록 맛이 떨어지고 질겨진다. 뜨거운 물에 살짝 데치듯 한번 파라락 끓여 입을 짝짝 벌인 것을 그대로 상에 올리는 것이, 조갯살을 먹기에는 가장 맛있다. 당연히 물은 적게 잡는 것이 좋다.

데친 조개를 그대로 상에 올려 마치 겨울 홍합 까먹듯이, 벌교에서 삶은 꼬막 한 사발씩 놓고 먹듯이, 그냥 조갯살을 발라먹기 시작한다. 와, 정말 통통하고 연하게 쫄깃한 이 바지락 맛을 어디에 비할 것인가. 괜히 조개구이 한다고 번거롭게 불 피울 것도 없고, 가장 담백하고 맛있게 먹는 방법이다.

남은 조개 국물은 된장국이나 미역국을 끓일 때 이용해도 좋고, 그 즉시 먹어도 좋다. 국물을 먹으려면 마늘 다진 것을 조금 넣고 약간의 소금 간을 한다. 먹기 직전에 부추나 파를 넣는데, 조갯국에는 파보다는 부추 숭숭 썰어 넣는 것이 훨씬 윗길이다.
주꾸미 역시 마찬가지다. 동그란 머리에 칼을 대지 않고 그냥 뒤집어 고동색의 내장만 빼내는 방식으로 다듬어 씻는다. 그 안에 든 하얀 것은 맛있는 주꾸미 알이니, 내장인 줄 알고 버리면 안 된다. 밀가루와 섞어 주물럭거려 빨면 다리의 빨판도 깨끗해지고 미끈거리던 것도 좀 사라진다. 이렇게 다듬은 주꾸미도, 팔팔 끓인 물에 넣어 살짝 데쳐 초고추장을 찍어먹으면 쫄깃하고 신선한 맛이 그만이다.

조금 요리스럽게, 그러나 번거롭지 않게 해먹고 싶은 분들에게는 샤브샤브를 권하고 싶다. 비린내 덜 나는 멸치를 끓여 육수를 만들고, 버섯ㆍ파ㆍ미나리ㆍ쑥갓ㆍ부추 등 샤브샤브에 넣고 싶은 야채를 입맛대로 준비한다. 나는 버섯을 좋아해서 새송이버섯ㆍ팽이버섯ㆍ표고버섯 등을 고루고루 준비한다. 특히 표고버섯은 봄에 제철을 맞아 어느 때보다도 탱탱하고 맛있으며 값도 싸다.

주꾸미와 야채는 손질해 접시에 수북수북 쌓아놓고, 찍어 먹을 소스도 미리 준비해 둔다. 소스는 입맛대로 한다. 초고추장, 간장과 고추냉이가 한국의 성인들이 가장 즐기는 소스겠지만, 서양식 겨자소스나 땅콩소스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나는 간장에 마늘장아찌 국물을 조금 섞어 싱겁고 감칠맛이 나도록 한 것을 좋아한다.

이제 먹기만 하면 된다. 상 위에서 조선간장으로 간을 한 육수를 팔팔 끓이면서, 온갖 재료를 집어넣었다가 꺼내어 소스를 찍어 먹는다. 이런 방식은 다소 부산스럽기는 하지만 다이내믹한 맛이 있어서 나름대로 매력적이다. 무엇보다도 야채와 주꾸미를 데쳐지자마자 바로 먹을 수 있으니 제철 재료의 맛을 손상시키지 않고 먹을 수 있다는 것이 장점이다. 향긋한 미나리와 수수한 냄새의 부추, 거기에 매끈하고 쫄깃한 주꾸미의 맛이 일품이다. 따끈한 국물에 청주나 막걸리 한잔 곁들이면 금상첨화 아니겠는가.


대중예술평론가. 요리 에세이 『팔방미인 이영미의 참하고 소박한 우리 밥상 이야기』와 『광화문 연가』 『한국인의 자화상, 드라마』 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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