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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추억] 故 조동필 고려대 명예교수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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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한국 경제사와 후진국 경제개발론 연구에 많은 업적을 남긴 조동필(趙東弼)고려대 명예교수가 지난 25일 8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제자들은 고인이 '큰 틀을 가진 경제학자'였다고 기억했다.

고대 경제학과 교수로 휴직 중인 황의각(黃義珏.61)금융통화위원회 위원은 "걸출한 입담으로 후진국 경제발전론을 강의하면서 우리 경제가 나아갈 길을 제시해 학생들을 완전히 사로잡곤 했다"고 회고했다.

또 "학계에 영향력이 큰 대학자였지만 그 흔한 학회 감투를 하나도 안쓰는 등 선비의 자세를 끝까지 지킨 분이었다"고 애도했다.

경기도 안성에서 태어난 趙명예교수는 일본 메이지(明治)대를 나와 동국대.중앙대 교수를 거쳐 1951~83년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로 재직했다. 97,98년엔 평택공과대 학장을 지냈다.

고인은 좌.우익의 사상 대립이 극심했던 47년부터 대학 강단에 섰지만 시장경제를 추구하면서도 농민.노동자 등 소외계층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균형감각을 잃지 않았다.

진보계열 정치가였던 죽산 조봉암(曺奉岩)씨가 초대 농림부 장관이던 48년에는 농업정책국장을 맡아 농지개혁 등 우리나라 농업정책의 기틀을 마련했다.

그의 농촌경제에 대한 관심은 그 후 '협동조합론' '농업정책론'과 같은 저술로 이어졌다. 고인은 농업협동조합이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68년에는 농협 운영위원을 맡아 조합의 기초를 닦는 데 이바지했다.

4.19혁명 이후엔 민족일보 논설위원으로 당시로선 상당히 앞서가는 글을 쓰다가 5.16 군사쿠데타로 잠시 옥고를 치렀다.

대학에서 은퇴한 뒤에는 고향인 경기도 안성으로 낙향해 과수원이 딸린 조그만 집에 살면서 수시로 강연을 다녔다. 강단은 떠났으나 활동은 현역 때와 별 차이 없이 왕성했다. 최근까지 고대.중앙대.원광대.호서대와 생산성협회 등에서 강연했다.

또 몇년 전까지만 해도 운동 삼아 경기도 안성에서 충남 온양까지 걸어서 왕복할 정도로 '노익장'을 과시했다.

사위인 유재훈(柳在薰.49)삼성물산 상무는 "평생 치과 한번 안 가실 정도로 건강하셨는데 지난 2월 학문적 동지이자 친구인 조기준(趙璣濬)고려대 명예교수가 별세한 뒤 매우 상심하면서 건강이 나빠진 것 같다"고 말했다.

고인은 외환위기 이후의 빈부 양극화 현상에 대해 자주 경고했다.

"허영심을 자제할 줄 모르는 자유방임에는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하지 않는다는 애덤 스미스의 말과 도덕이 없는 이익 우선의 자본주의는 국민경제를 위태롭게 한다는 케인스의 지적을 새겨 들어야 한다." 그가 지난해 한 잡지에 기고한 '격차 사회의 슬픔'이란 글의 내용이다.

정철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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