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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d capitalist/펑샤오펑 LDK 회장] 그는 ‘붉은 아인슈타인’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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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d capitalist 시리즈를 시작하며

‘홍색자본가(紅色資本家·Red capitalist)’란 마오쩌둥이 건국(1949년) 직후 중국에서 활동하던 자본가들을 회유하기 위해 일컬은 말이다. 이 말은 여전히 유효하다. ‘공산주의 국가 중국에서 활동하는 자본가’라는 뜻으로 널리 쓰인다. 1978년 개혁·개방 이후 경제가 급성장하고, 부(富)가 축적되면서 중국 전역에서 자본가·기업인들이 비 온 뒤 죽순 피어나듯 생겨나고 있다. 이들은 중국인 특유의 상인정신으로 무장했다. 부의 축적 역사가 짧기에 이들 대부분은 젊고 패기가 넘친다. 레드 캐피털리스트들은 중국뿐 아니라 세계 산업지도를 바꿀 만큼 영향력을 확대해 나가고 있다. 이 시점에서 중국의 레드 캐피털리스트들을 주목하고 소개하는 이유다.


“빛이 미래를 밝힐 것”이라는게 펑샤오펑 LDK 회장의 사업 신조다. 그는 그야말로 ‘전광석화(電光石火)’ 같은 빠르기로 기업을 일으켰고 ‘만만디는 없다’고 말하며 사업을 확장해 가고 있다. [김형수 기자]

1997년 봄. 22세의 한 중국 청년이 장쑤성 쑤저우(蘇州)에서 작은 공장을 차렸다. 작업용 목장갑을 만들어 해외에 수출하는 회사였다. 그는 명함도 새로 만들었다. 명함 뒷면 영어이름을 ‘LDK’라고 새겨 넣었다. 해외 파트너들은 그를 ‘LDK Peng’이라고 불렀다.

그로부터 10여 년이 지난 2007년 6월 1일. 뉴욕증권거래소(NYSE)에 한 중국 회사가 상장된다. ‘중국의 태양광에너지 전문기업’으로 알려진 회사였다. 종목명을 ‘LDK’라 했다. 그날 한 중국인이 뉴욕증권거래소에 나타나 거래 시작 벨을 울린다. 10년 전 쑤저우에서 ‘LDK’라는 명함을 들고 다니던 바로 그 청년이었다.

청년의 이름 펑샤오펑(彭小峰·35). 중국 장시(江西)성 신위(新余)에 있는 ‘싸이웨이(賽維)LDK’의 창업자이자 회장이다. LDK는 세계 최대 태양전지(cell)용 실리콘웨이퍼 생산업체다. 세계시장의 약 18%를 차지하고 있다.

펑 회장을 찾아가는 길은 멀었다. 상하이 훙차오(虹橋)공항에 내려 국내선으로 갈아탄 뒤 다시 1시간 반을 날아가 난창(南昌)공항에 도착했다. 거기서 다시 자동차로 2시간을 달려서야 겨우 신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새벽에 출발해 오후 4시에야 도착할 수 있었다.

회장실 문을 밀치고 들어서니 얼굴에 시골 티가 흐르는 젊은이가 앉아 있다. 펑 회장이었다. 그는 “멀지요?”라며 서울에서 온 취재진을 반긴다. 명함을 주고받았다. 뒷면을 보니 ‘LDK Peng’이라고 쓰여 있었다. 서울에서 오는 길 내내 궁금했던 질문을 먼저 던졌다.

● 왜 ‘LDK’인가요?

“Light Delivery King의 약자입니다. ‘빛을 운반하는 왕’이라는 뜻이지요. ‘빛을 초월하는 속도로 뛰자’는 생활신조를 이름에 반영했습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물리가 좋았습니다. 아인슈타인과 관련된 책은 닥치는 대로 읽었지요. 그는 나의 영웅이자 인생의 목표였습니다. 그때부터 빛을 쫓아다녔지요. 물리학을 더 배우고 싶어 유학을 준비하기도 했습니다.”

● 그래서 종목 이름을 ‘LDK’로 한 건가요?

“물론이지요. 회사 이름에도 LDK를 넣었잖아요. ‘빛이 우리의 미래를 밝힌다(陽光照亮未來)’가 저희 회사의 모토입니다.”

● 유학은 왜 포기했나요?

“장시성의 농촌 학생에게 해외 유학은 사치였습니다. 돈이 없었지요. 18세 때 고등학교(대외무역직업학교) 과정을 졸업한 뒤 작은 무역회사에 취직했습니다. 영어를 꽤 했기에 귀여움도 받았지요. 그러나 시골 무역회사는 나의 꿈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어느 날 ‘아인슈타인은 나와 같은 나이에 무엇을 했을까’ 하고 책을 찾아봤습니다. 그는 ‘광전효과’ 연구에 몰두하고 있었고, 이 연구로 노벨물리학상을 받게 되지요. 아인슈타인이 노벨상을 만들던 나이에 시골에 묻혀 살아야 하는 나를 절대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 그래서 고향을 떠났군요.

“22세 때 단돈 2만 위안(약 360만원)을 들고 고향을 떠났고, 정착한 곳이 쑤저우였습니다. 기계 몇 대를 사 작업용 장갑 공장을 차렸습니다. ‘LDK’ 명함을 만든 게 그때입니다. 장갑은 생산하기가 무섭게 수출됐습니다. 무역회사 다닐 때 거래했던 해외 수입상들이 제품을 다 받아줬거든요. 공장을 계속 늘렸고, 2003년께엔 한 해 매출액이 18억 위안(약 3240억원)에 이르렀습니다. ‘쑤저우의 장갑 갑부’라는 별명도 얻었지요.”

● 왜 태양광 분야로 업종을 바꾸었나요?

“2003년 독일 출장 중 주택과 빌딩에 붙어있는 태양광전지판을 보게 됐습니다. 이거다 싶었지요. 다시 빛을 쫓기로 했습니다. 한동안 잠자고 있던 ‘아인슈타인의 꿈’이 다시 꿈틀거렸다고나 할까요. 시장조사를 했습니다. 당시 중국엔 태양전지·태양전지판 제작업체는 많았지만, 정작 이들 제품의 원재료인 실리콘웨이퍼 생산 회사는 많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뛰어들었지요.”

● 창업이 쉽지만은 않았을 텐데요.

“고향에 ‘LDK’를 세운 게 2005년 7월이었습니다. 미국에서 설비를 사왔지요. 장갑으로 번 돈을 모두 쏟아부어도 아깝지 않았습니다. 이듬해 4월 제품이 쏟아져 나왔어요. 남들이 시장조사·타당성 검토로 머뭇거릴 때 우리는 100m 경주하듯 앞으로 내달렸습니다. 내 사업에 만만디(慢慢的)는 없습니다. 경쟁사들이 우리의 존재를 깨달았을 때 그들은 이미 우리의 상대가 아니었지요.”

● 생산한다고 다 팔리는 건 아니잖아요.

“마침 전 세계적으로 태양광 산업이 붐을 이뤘습니다. 2005년 말 t당 80달러이던 웨이퍼 가격이 1년 뒤 300~400달러로 올랐으니까요. 해외 벤처캐피털의 투자를 받았고, 그 돈으로 공장을 늘렸습니다. 창업 1년 만에 중국 최대 웨이퍼 가공업체가 됐고 이듬해에는 아시아 최대, 그 이듬해엔 세계 최대로 올라섰습니다. 현재 생산능력은 2000㎿ 규모로 2위보다 2배 많습니다. 주위에서 ‘빛과 같은 빠르기로 사업을 한다’고 하더군요.”

● LDK의 미래 비전이 궁금합니다.

“IBM이나 마이크로소프트 같은 회사가 존경 받는 것은 인간의 삶을 바꿨기 때문입니다. 그런 회사를 만들고 싶습니다. 태양에너지로 인간의 생활 양식을 바꾸는, 그런 회사 말입니다. 한국에서도 태양광 산업이 발전하는 것으로 압니다. 우리는 경쟁자가 아닙니다. 함께 손을 잡고 시장을 만들어 가야 합니다.”

● 2007년 포브스 선정 중국 제7위의 부자가 됐더군요.

“그해 상장으로 부(富)가 늘었습니다. 별 의미는 없어요. 제가 갖고 있는 주식에 주가를 곱한 것에 불과합니다. 한 번도 내가 부자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요. 아인슈타인 같은 물리학자가 되겠다는 내 꿈은 아직 진행 중입니다. 대학 강의실이 아닌 산업현장에서 그 꿈을 꼭 이룰 겁니다.”

신위(新余)=한우덕 기자
사진=김형수 기자


J칵테일>> 내가 본 펑샤오펑 회장

펑샤오펑 회장의 첫인상은 ‘순박하다’는 것이었다. 얼굴에 ‘시골티’가 흘렀다. 그 스스로도 ‘나는 샹샤런(鄕下人·시골 사람)’이라고 말한다. 주변 사람들은 그러나 ‘순박함의 뒷면에는 과감성과 대담성이 감춰져 있다’고 평가한다. 일단 결정되면 무서운 속도로 일을 밀어붙친다는 얘기다. 야오펑(姚峰) 홍보담당관은 “물불 가리지 않은 그의 ‘저돌성’이 오늘의 LDK를 만든 요인 중 하나”라고 말했다. 펑 회장은 자선활동에도 열심이다.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회장의 자선활동에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그는 2008년 5월 ‘LDK자선기금’을 설립하고, 개인 재산 1억 위안(약 170억원)을 내놓았다. 기금 규모도 5년 내 5배 늘릴 계획이다. 그의 주변에서 ‘자선활동도 빛과 같은 속도로 추진한다’는 말이 나온다.


싸이웨이(賽維)LDK

세계 최대 태양전지(cell)용 실리콘웨이퍼(multicrystalline solar wafers) 생산업체다. 약 2000㎿(일반 화력발전소 약 3개 규모)의 생산설비를 갖추고 있다. 제품의 약 70%를 해외에 수출하고, 나머지 30%는 중국 업체에 공급한다.

LDK는 2007년 6월 뉴욕증권거래소에 상장하면서 세계 업계의 주목을 끌기 시작했다. 발행 규모 4억7000만 달러로 당시 중국의 최대 뉴욕증시 상장업체 기록을 세웠다. 2009년 매출액은 10억9800만 달러로 전년보다 33% 줄었다. 2008년 한때 ㎏당 480달러에 달했던 웨이퍼 가격이 지난해 말 50달러 선으로 급락했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약 2만여 명의 직원이 있으며 국내외 400여 명의 연구개발(R&D) 직원을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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