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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의 지식사회에 묻는다] 6. 우리만의 지식은 있는가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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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나는 아직까지 '콜로라도의 달밤'이란 멜로디를 아는 미국인을 만나지 못했다. 중학교 교과서에서 배운 그 멜로디 말이다.

내가 중.고등학교에서 배운 포스터의 가곡은 7~8곡 정도나 된다.'오 수재너''스와니 강''금발의 제니''켄터키 옛집''목화밭''꿈꾸는 가인''올드 블랙 조'…. 그러나 정작 중국 민요 한곡 제대로 알지 못한다. 동북아시대 주역의 하나라고 자처하면서 정작 우리 머리 속은 대단히 비대칭적이다.

왜 우리의 지식이 없겠는가. 문제는 그 많은 지식을 담아내는 인식의 지도일 것이다. 나는 유학을 가지 않았고, 이 땅에서 뭉개고 앉아 공부를 했다.

그래서 내가 배웠던 학문과 지식을 가끔 지식사회학적으로 관찰해 보곤 하는 버릇이 생겼다.

내가 배운 이론들은 대체로 태어난 곳에서 약간 늦게 들어와 오래 머무르는 특성이 있다. 손쉽게 우리 현실에 그 이론들이 대입되다가 어느 순간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귀신처럼 그냥 스쳐 지나가 버린 것이다.

그런 다음 사람들은 부두에서 새로 들어온 화물 중 쓸 만한 것이 없는지 두리번거린다. 새로운 화물을 숭배하는 남태평양 도서민들이나 우리 지식인들이 얼마나 다르겠는가. 근대화론이 그랬고, 수많은 마르크스주의 변종이 그랬으며, 포스트모더니즘이 그랬고, 탈식민주의가 또 그런 경로를 걸어가고 있다.

해방 이후 구미(歐美)유학이 본격적으로 이뤄져 근대 지식이 수입되기 시작한 것은 사오십년의 역사를 자랑하지만 남부끄럽지 않게 내놓을 만한 지적 생산물이 몇 개나 될까.

일제시대에, 난리통에 당대를 고민하고 글을 썼던 선대 지식인들보다 얼마나 나아졌을까. 양적으로는 비약적으로 증가했는지 모르지만 질적으로 그 때보다 더 낫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과문한 탓인지 모르지만 정치학을 공부한 나는 아직도 그레고리 헨더슨의 『소용돌이의 정치』나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에 견줄 만한 우리나라 정치학자의 저작을 본 적이 없다.

폴 크루그먼이나 아이센그린과 같이 시대를 읽는 통찰력있는 에세이를 쓰는 경제학자도 보지 못했다. 살만 루슈디나 나이폴의 소설들을 제대로 비평한 영문학자의 글도 아직 보지 못했다. 이상하게도 미국 유학세대가 학계를 지배하고 부지런히 외국을 드나들지만 세계 시간과의 호흡에도 힘들어하는 것이다. 왜 그럴까.

나는 그 이유가 우리의 지식세계를 조직하고 조절하는 지도가 없기 때문이라고 본다. 자아준거적 정체성의 부재(不在)야말로 가장 큰 문제인 것이다. 우리가 스스로 그린 지도가 없기에, 우리가 만든 현장교범이 없기에 우리 지식의 세계는 과식과 설사의 사이클을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수많은 지적 자원이 낭비되고 중복 투자되고, 결국은 앵무새처럼 유행가만 반복하다 지쳐 쓰러지고 말게 된다. 그 결과 머리통은 자그마하고 몸통은 우스꽝스럽게 큰 공룡과 같은 지식세계가 우리 앞에 놓여 있는 것이다.

우리의 인지지도를 다시 그린다는 것은 지난 50년간 폭발적으로 팽창한 지식과 지식인사회를 재점검하고,'지금 이곳'의 현실과 코드를 맞추고 화해하는 일이 될 것이다. 그것은 신토불이(身土不二)를 외치며, 우리의 것이 마냥 좋다는 토착주의자들의 한풀이가 될 수도 없고, 영어(논문)만이 살 길이라는 무차별적 개방주의자들의 주장이 될 수도 없다.

신토불이판 지식인들의 우스꽝스런 행태를 하나만 지적해 보겠다. 우리가 노벨 문학상을 못 받는 이유가 마치 우리 작품들이 국제사회에 소개가 덜 되어 그럴 것이라고 이들은 가정한다. 그래서 요즈음엔 2,3류에 속하는 시와 소설들까지 번역되고 있는 실정이다.

나는 이런 돈으로 유망한 젊은 작가들을 해외로 보내어 세계의 신선한 공기를 호흡할 기회를 주는 것이 노벨상 수상을 훨씬 더 앞당길 것이라고 생각한다. 토장국 냄새만으로는 세계의 독자들을 감동시킬 수 없으니 서구의 정전(正典)과 아시아의 정전을 통달한 작가들을 양성해야만 할 것이리라.

세계화를 내세우며 영어논문을 쓰지 않으면 바보 취급하는 풍토도 점차 확산되고 있다. 영어논문이 많아지는 것은 권장할 일이다. 그렇지만 무엇을 쓰느냐 하는 문제도 중요한 것이다. 대부분이 외국인들과의 비교우위가 없는 한국 문제에 관한 시시껄렁한 이야기라면 한국의 학문과 지식인사회에 기여하는 바는 크지 않을 것이다.

지식은 지정학적이다. 그런 의미에서 권력현상이기도 하다. 오늘날 사회과학의 대가들은 그 어디에도 보편타당한 인문사회과학적인 지식이 존재한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 객관성.탈주술화에 대한 믿음은 서구중심주의가 만들어낸 신화였다고 비판한다.

근대화나 근대성, 합리성도 단수가 아니라 복수라는 믿음이 확산되고 있다. 근대적 지식세계에 대한 반성적 성찰이 행해지고 있는 이 때 우리는 어떻게 지식을 만들고 재생산해야만 하는가.

우리의 지식은 우리에 대한 지식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아르튀르 랭보가 그랬다지 않는가."나는 타자(他者)"라고. 이는 다른 이들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내 얼굴의 모습도 알 수 있다는 말이다.

토니 모리슨.데릭 월콧.나이폴과 같은 노벨 문학상 수상작가들의 작품이 '당한 자'의 입장에서 쓰인 탈식민주의 문학이건만, 반일 저항민족주의가 유난히도 센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거의 읽히지 않는 역설을 한번 생각해 보시라.

다문화주의에 대한 이해가 거의 백치(白痴)에 가까운 우리들에게는 고감도의 '카리브적 감수성'을 주입하는 것이 더욱 필요하기 때문에 타문화에 대한 지식의 양도 크게 늘릴 일이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얼굴을 정확히 변별하는 길이 되기도 할 것이고, 우리의 지식이 되기도 할 터이다.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서구적 지식의 생산과 재생산 메커니즘을 이제 심각하게 반성해볼 필요가 있다. 서구에서조차 서구적 지식이 문제시되고 있는 이 때, 우리가 이를 신성한 황소처럼 받드는 것도 어불성설이다.

미국 중심의 '묻지마 유학' 행태도 이제는 재고해야만 할 것이고, 말로만 떠드는 자아준거적 학문 타령도 현장에 깊숙이 내려온 실천으로 자리를 잡아야 할 것이다.

이성형 박사(세종연구소 초빙학자.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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