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해신 - 제1부 질풍노도 (56)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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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그뿐인가.

장보고가 흥덕대왕에게 공상한 물건은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장보고가 주지(周紙)로 된 화첩 하나를 두 손으로 받쳐 올렸다.

"이것은 무엇인가."

흥덕대왕이 물어 말하였다.

"펼쳐보시면 아실 것이나이다."

장보고는 대답 대신 웃으며 말하였다.흥덕대왕은 가로로 길게 이어서 둥글게 만 화첩을 펼쳐보았다. 그러자 종이 위에 쓰여진 시문 하나가 드러났다.

흥덕대왕은 그 시문을 읽어보았다.

'좌우명(座右銘)

천리시족하(千里始足下)/고산기미진(高山起微塵)/오도역여차(吾道亦如此)/행지귀일신(行之貴日新)'

그 문장의 뜻은 다음과 같았다.

"천리 길도 발밑에서 시작되고

높은 산도 작은 먼지에서 시작된다.

나의 길도 역시 이와 같다.

이를 실천함에 날로 새로움을 귀하게 여기네."

시문을 읽은 흥덕대왕은 이를 옆에 서있는 아우 김충공에게 전해주면서 말하였다.

"상대등은 이 시가 누구의 시인 줄 알겠는가."

그러자 김충공은 대왕이 건네준 시를 일별하고 나서 대답하였다.

"알고 있나이다."

"누구의 시인가."

"바로 백거이의 시이나이다."

백거이(白居易.772~846).중국 중당기 최고의 시인. 자는 낙천(樂天), 호는 취음선생(醉吟先生)이었다. 이백(李白)이 죽은 지 십년,두보(杜甫)가 죽은 지 2년 후에 태어난 그는 같은 시대인 한유(韓愈)와 더불어 '이두한백(李杜韓白)'으로 불렸던 당대 최고의 시인이었다.

29세 때 진사에 급제하였고, 32세 때 황제의 친시(親試)를 거쳐 왕실의 계관시인이 되었다. 811년 40세 때 어머니를 여의고, 이듬해에 어린 딸마저 잃자 인생에 있어 죽음의 문제를 깊이 생각하게 되었고, 불교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던 시인이었다.

백거이의 평판은 바다를 건너 신라에서도 유명하였다.이 무렵 백거이는 56세의 나이로 항주자사(抗州刺史)로 머물고 있었는데, 항주의 아름다운 풍광에 자극을 받아 수많은 시들을 창작하였고, 일찍부터 문학적 지기로서 알고 지냈던 원진(元)과 더불어 『백씨장경집(白氏長慶集)』을 간행하여 시인으로서 절정기에 있었다.

바로 이 『백씨장경집』은 전 50권으로 장보고가 흥덕대왕을 배알하기 4년 전인 824년에 편집되었는데,이 서문에는 다음과 같은 의미심장한 구절이 나온다.

"…신라상인 중에는 본국재상의 부탁이라고 하면서 백거이의 시문이 나올 때마다 일편에 백금(白金)을 아끼지 않고 모조리 점매(占買)하여 간 일이 있을 정도였다."

『백씨장경집』에 나오는 신라상인은 그렇다면 장보고를 비롯한 신라선단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었을까. 어쨌든 백거이의 『백씨장경집』은 일본에서도 지식인 사회에서 열광적인 숭배대상이었던 것이었다.

백거이의 이름이 일본에 알려진 것은 이보다 20년 뒤인 844년의 일로 이때 입당승 혜악이 소주(蘇州) 남선사(南禪寺)에 있던 문집을 필사해서 돌아온 후부터였던 것이었다.

흥덕대왕을 비롯하여 전 신하들은 이 무렵 백거이의 필명을 익히 전해 들어서 알고 있었던 것이다.특히 백거이가 44살에 쓴 '초당중제(草堂重題)'란 시는 신라의 귀족들이 모두 암송하고 있었던 명시 중의 명시였다.

이 무렵 백거이는 사회를 비판하는 시를 짓고 있었는데,그의 시가 고급관료들의 반감을 사서 구강(九江)의 사마(司馬)로 좌천됐던 것이다.

여기서 그는 인생에 대한 회의에 사로잡혔고, 문학에 대한 치열한 반성 끝에 전혀 새로운 시를 창작하기 시작하였는데 바로 이 시가 백거이의 작품 중에서 백미로 꼽히는 '초당에 앉아서 거듭 쓴다'라는 제목의 '초당중제'였던 것이다.

글=최인호

그림=이우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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