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25세에 미국 초등학생 된 전직 교장 안창호

중앙선데이

입력

"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한반도는 1894년 동학농민운동과 청일전쟁을 겪으며 혼란의 수렁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안창호(사진)는 가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삼촌의 도움을 받아 고향(평남 강서군)을 떠나 서울 유학을 왔다. 어느 날 정동교회 옆 골목길을 지나다 “배우고 싶은 사람은 누구나 먹고 자고 공부할 수 있는 우리 학교로 오라”고 권유하는 미국 선교사를 만나 구세학당(연희전문학교의 전신)에 입학했다. 그는 구세학당 조교가 돼 자기보다 나이 많은 학생들을 잘 이끌었다.

안창호는 1897년 약혼녀 이혜련을 서울로 데려와 정동여학당(현재 정신여고)에 입학시켰다. 당시 그는 평양 만민공동회에서 탐관오리의 부정부패를 통쾌하게 비판한 '쾌재정 연설'로 이름을 떨쳤다. 21세인 1899년에는 평남 강서에 한국 최초로 남녀 공학 사립 초등학교인 '점진(漸進)학교'를 설립하고 교장으로 취임했다. 학교 이름엔 실력 양성과 점진주의의 뜻이 담겨 있다.

안창호는 1902년 9월 제중원(세브란스병원의 전신)에서 언더우드 학당 교장인 프레더릭 밀러의 주례로 이혜련과 결혼하고 바로 다음 날 미국으로 떠났다. 그는 교육학·신학을 공부하고 고국에 돌아와 교육 사업을 할 생각이었다. 인천항을 떠날 때는 주한 미국 총영사가 샌프란시스코 이민국에 '영어를 잘하지 못하는 안창호 부부를 예의를 갖춰 맞아줄 것'을 부탁하는 소개서를 갖고 있었다.

미국에 도착한 안창호는 샌프란시스코에서 하우스보이(가정 청소부)를 비롯한 막노동을 했지만 학교 공부에 대한 열망이 강했다. 그는 미국 초등학교부터 고교~대학까지 모든 교육 시스템을 직접 경험하고 싶었다. 안창호는 먼저 초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어느 신문기자가 “조선에서 온 기특한 노(老)학생”이라는 기사를 써 문제가 발생했다. 미국의 초교는 규정상 18세 이상의 입학을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퇴학을 당한 뒤 다른 학교를 찾아갔으나 입학은 어려웠다. 그러나 세 번째 찾아간 초교의 여성 교장이 “17세까지 입학을 허가한다는 규정은 동양 사람에겐 해당되지 않는다”는 결정을 내렸다.

안창호는 25세에 초교에 들어가 자기보다 열 살 넘게 어린 학생들과 함께 공부할 수 있었다. 4년 전 '점진학교' 교장이던 안창호가 온갖 노력 끝에 미국 초교생이 된 것이다. 교육에 대한 집념과 열망이 어느 정도였는지 말해준다. 안창호는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수감됐으나 병보석으로 풀려나 1938년 별세했다. 일제는 민심의 동요를 우려해 장례를 서울 망우리 공동묘지에서 간단히 치르게 했다. 장례식에는 친인척 7명과 목사 장홍범, 장로 조만식만 참석했다.

안창호와 이혜련은 슬하에 3남2녀를 두었다. 부인은 삯바느질, 청소 등을 하며 자녀들을 키웠다. 안창호가 부인에게 보낸 1904년 이후 서한을 보면 항상 “나의 사랑 혜련에게”로 시작된다. 현재 113통이 남아 있다. 이혜련은 69년(당시 85세) LA에서 별세했다. 장남 필립은 할리우드 최초의 동양인 배우로서 300여 편의 영화·드라마에 출연해 할리우드 '명성의 거리'에 이름이 새겨졌다. 장녀 수산은 미국에서 아시아 최초의 여성 해군 장교가 돼 전투기 기관포 사격술을 가르치다 대위로 전역했다.

LA=고재방 하버드대 방문교수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