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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로커' 탈북자 국내 정착 걸림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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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지난해 한국에 온 탈북자 박명숙(여.가명)씨는 최근 자신의 한국 입국을 도왔던 브로커에게 600만원을 전달했다. 북한에 남아 있는 동생 내외를 데려오기 위해 1인당 300만원씩 계산한 것으로 입국 추진 착수금이다.

박씨는 이 돈을 구하기 위해 이른바 '통장깡'을 했다. 정부가 탈북자 정착 지원을 위해 분기별로 100여만원씩 지급하는 입금통장을 브로커에게 넘기고 수수료를 뺀 현금을 받은 것이다.

입국 당시 정부에서 정착지원금 1463만원을 일시불로 받은 그는 자신의 입국을 도운 브로커에게 지급한 수수료, 임대아파트 보증금, 생필품 구입, 생활비 등으로 이미 다 쓴 상태였다.

박씨는 "앞으로 4년 동안 1700만원 정도 받을 수 있는 통장을 넘기고 1000만원을 받았다"며 "동생 내외가 탈북에 성공하면 또 정착지원금이 나오기 때문에 그 돈으로 살면 된다"고 말했다.

최근 북한 주민들의 탈북에 브로커들이 달라붙고 있다. 중국 정부가 탈북자에 대한 강경 방침을 천명하면서 '탈북사업'이 브로커들의 돈벌이 대상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입국에 성공한 탈북자가 가족의 탈북과 국내 입국을 돕는 '릴레이 탈북'도 덩달아 늘고 있다. 일부 브로커는 보상금이 훨씬 많은 국군포로를 집중적으로 물색하는 것으로 알려져 비난이 일고 있다.

?국내 입국 방법은 막연하고=탈북자들이 브로커를 찾는 이유는 중국 정부가 탈북자를 합법적인 난민으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북한을 의식한 중국 정부는 북한을 간신히 빠져나온 탈북자를 불법 체류자로 간주해 적발하는 대로 북한으로 강제 송환하고 있다. 탈북자 최용수(57.가명)씨는 1997년 탈북한 뒤 3년 동안 중국 옌볜(延邊)에서 월급 한 푼 받지 않고 농사일을 했다고 한다.

그는 "소 달구지 대신 벌목한 나무를 옮기기도 했지만 돈을 달라고 하면 중국 공안에 신고할까봐 대들지도 못했다"고 회고했다.

공식적인 국내 입국 루트가 없는 상황에서 탈북자는 브로커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지난해 입국한 탈북자 유금식(52.가명)씨는 "혼자서는 길도, 공안들을 피할 방법도 몰라 브로커를 찾게 됐다"고 말했다.

우리 정부는 중국과의 외교 마찰, 북한과의 관계 악화 등을 이유로 탈북자 문제에 소극적이다. 일부에선 우리 정부의 무관심이 브로커를 양산했다는 주장을 제기한다. 북한민주화네트워크 오경섭 사무국장은 "많은 탈북자가 중국에서 인권유린을 당하며 한국행을 간절히 원하고 있다"며 "정부에서 뚜렷한 대책을 세우지 않는 한 브로커를 통한 입국은 늘어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정착지원금은 브로커에 넘어가고=탈북자의 한국 사회 적응을 돕기 위해 정부가 제공하는 정착지원금 대부분이 브로커에게 수수료로 제공돼 탈북자의 국내 정착에 큰 걸림돌이 되고 있는 것이다.

민간 차원의 북한인권.지원활동으로 여겨졌던 탈북자 입국이 일부이긴 하나 이제는 전문 브로커들이 돈을 벌 목적으로 한국에 입국할 중국 내 탈북자들을 모집하는 사업으로 변질되고 있다. 탈북자들이 한국으로 들어오기 위해 선택하는 루트는 중국 주재 외국공관 진입, 몽골.베트남 등 제3국 경유, 위조여권 이용 등이다. 탈북자의 공통점은 입국을 도와줄 브로커가 필요하며, 국내 입국 성공시 수고비(수수료)를 지급해야 한다.

현재 1인 탈북자의 경우 정부에서 지급되는 정착금 총액은 3590만원. 이 가운데 1321만원은 일시불로, 나머지 2269만원은 5년 동안 분기별로 113만여원씩 나눠 지급된다.

릴레이 탈북을 시도하는 탈북자들 사이에서는 브로커에게 착수금으로 줄 목돈을 마련하기 위해 분기별로 나눠 지급되는 정착금 통장을 넘긴 뒤 일정 수수료를 떼고 목돈을 받는 통장깡까지 유행하고 있다. '통장깡'은 정부 당국조차 적발 및 수사가 힘들다고 실토할 정도로 탈북자와 브로커 사이에 점조직 형태로 비밀리에 이뤄지고 있다.

최근 들어오는 탈북자들은 열에 아홉은 브로커의 도움으로 입국했다는 게 탈북 사회의 증언이다. 2002년 10월 베이징 주재 한국영사관에 진입한 마모(53.여)씨는 "당시 영사관에 있던 60여명의 탈북자 중 브로커를 통하지 않고 들어온 사람은 15명도 안 됐다"며 "요즘은 90% 이상이 브로커의 도움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특별취재팀=유광종 베이징특파원.이영종 정치부기자.민동기·임미진·박성우 사회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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