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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 베를린 정신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이번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공격은 좀 특이한 면이 있다. 오사마 빈 라덴과 탈레반 정권에는 폭탄을 투하하는 대신 굶주린 주민에겐 식량을 공급하고 있다. 꼭 병 주고 약 주는 격이다. 신조어 만들기 좋아하는 유럽 언론들은 벌써 같은 B자 돌림인 '빵(Bread)과 폭탄(Bomb)'이란 말로 이번 전쟁의 양면성을 설명하고 있다.

미국은 개전 직후 난민이 몰린 국경지역에 식량과 의약품을 담은 봉투 3만7천5백개를 투하했다. '인도적 일일분 식량'이라는 글귀와 함께 성조기가 그려진 노란봉투 안에는 2천2백㎈의 식품이 들어 있다.

이 작전을 수행한 C-17 수송기 2대가 며칠 전 독일 람슈타인 공군기지에 무사귀환했다. 그런데 이 수송기의 애칭이 재미있다. '베를린 정신(The Spirit of Berlin)'이다. 갑자기 웬 베를린 정신인가.

1948년 6월부터 49년 5월까지 약 11개월간 소련이 서베를린을 봉쇄하자 미국은 대대적인 공수작전으로 서베를린 시민을 기아에서 구출했다.당시 미군은 총 20만회의 '출격'으로 1백40만t의 식량과 생필품을 실어 날랐다. 이때 생긴 말이 '건포도 폭격기(Rosinenbomber)'다.

폭탄 대신 빵이나 건포도 같은 식량을 투하한 B-29 등 당시 작전에 참가했던 폭격기를 일컫는 말이다. 이제 유럽경제의 맹주로 등장한 독일이지만 패전 직후 춥고 배고프던 시절 이처럼 도와준 건포도 폭격기의 은혜를 아직도 잊지 않고 있다.

미국으로서는 이번 식량투하가 베를린 공수(空輸)와 일맥상통하는 인도적 행위임을 은근히 과시하고 싶은 것이다. 동시에 이번 전쟁이 결코 아프가니스탄 국민이나 이슬람 교도 전체를 상대로 한 '문명의 충돌'이 아니란 점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인도적 행위도 전쟁의 큰 틀에서 보면 적의 내분을 가속하면서 이슬람권의 지지를 이끌어 내기 위한 양동작전의 성격이 강하다. '국경없는 의사회'의 지적처럼 "공습을 정당화하기 위한 선전"이라는 비판도 많다. 탈레반 이후를 대비한 장기 포석의 의미도 있다.

어쨌든 요즘 이슬람권은 물론 독일 등 전세계에서 미국이 주장하는 이 '인도적' 전쟁에 반대하는 데모가 연일 벌어지고 있다. 당장 전쟁을 끝내는 것이 가장 인도적이라는 것이다.

아프가니스탄 난민에 대한 미국의 이러한 배려를 보면서 문득 우리 노근리 사건이 생각난다. 보상문제가 '인도적'으로 잘 해결돼야 할 텐데.

유재식 베를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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